예수님이 노숙자래요!
예수님이 노숙자래요!
  • 민돈원
  • 승인 2019.07.02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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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섬기고 있는 상천교회는 상천초등학교와 각각의 입구가 서로 마주 보고 위치해 있다. 그래서 수시로 어린이들을 접하게 된다. 어제는 수업중 6학년 어린이들이 교회 앞길에서 그들 담임선생님과 함께 특별활동 시간이었던 것 같다. 마침 우리교회 출석하는 한 어린이가 같은 반 친구를 가리키면서 ‘목사님, 저 애가 예수님을 욕했어요!’ ‘그래? ...’ 그러자 이번에는 다시 ‘목사님, 예수님이 노숙자래요!’ 라고 덧붙인다. 아마도 우리 교회학교 어린이가 이 말을 듣고 자기 딴에는 아무래도 기분 나빴던 것 같다. 그런데 마침 나와 마주쳤으니 목사님이 약간은 혼 좀 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러자 내가 ‘그 애는 예수님을 모르니까 그랬을 거야!’라고 했더니 그렇게 말한 아이는 어린이답지 않게 별로 미안한 기색도 없이 도리어 담담한 모습이었다.(돌아서고 나니 우리교회 어린이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라도 한마디 꾸짖어 주지 못한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잠깐 스쳐 지나간 어린이들끼리 하는 내용을 들은 대화 내용이었지만 이 후 내 책상 앞에 앉아있는데 몇 시간 전에 들은 그 말이 내 귓전에 다시 울려오는 것 같았다.

‘예수님이 노숙자래요!’

대개 이런 말을 시쳇말로 ‘불편한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실제 예수님이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데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구약에서도 수차례 믿음의 사람들이 ‘나그네’라고 이미 밝히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예컨대 아브라함이 그렇고, 야곱이 그러했으며, 다윗 역시 나그네로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스데반은 마지막 순교직전 설교하는 중에 모세가 나그네였다고 증거한다(행7:29) 그리고 바울과 베드로, 요한 사도들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같이 나그네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나그네라는 용어가 좀 거친 용어로 표현하자면 그 어린이가 예수님을 무시하듯 빈정대며 교회 나오는 친구에게 쏘아붙이듯 말한 ‘노숙자’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물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나그네’라는 표현과 의미는 철없고 부질없는 그 어린이가 자기 식으로 뱉어 버린 노숙자라는 의미와 분명히 같을 수는 없다. 이는 마치 어린이가 단순히 목이 타서 ‘목마르다’ 라고 한 말과 내가 주님의 말씀을 너무 사모한 나머지 기도하던 중에 ‘목마르다’ 라는 말은 똑같은 우리말일지라도 그 뉘앙스, 즉 표현의 의미와 언어가치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예수님은 노숙자 같은 나그네이셨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실 때부터 알 수 있듯이 요즘처럼 제대로 된 산부인과에서 태어나신 것도 아니고 시설 좋은 조리원에서 보호받은 것도 아니다. 나아가 근사한 집 한 칸은 고사하고 머리 둘 곳도 없으셨다. 산에서 들에서 그저 지내셨던 삶이기에 하늘을 이불삼고 모래바닥과 풀포기 있는 곳을 침대 삼으셨을 잠자리 아니지 않았겠는가? 먹는 것은 어떠했는가? 우리처럼 한주일이 멀다하고 최고의 부위 고기파티로 뱃살 늘어질 만큼 그것도 무한 리필로 먹다가 얼마나 먹었는지 과식으로 이제 토해낼 만큼의 그런 포만감의 자리가 아닌, 하나님 나라 전파하시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메마른 광야 길을 가시다 식사할 겨를도 없을 만큼 끼니도 지나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가기도 했다.

자고로 나그네는 짐이 가벼워야 한다. 나그네가 무슨 캐리어(짐)를 그토록 많이 소지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가득 채운 캐리어(감투)) 늘리기에 여념이 없고 알고 보면 그 캐리어 때문에 지도자들의 싸움과 탐욕은 그치지 않는다. 그들로 인해 절대 다수 사람들의 시름은 깊어만 간다. 나그네의 삶을 망각하는데서 오는 결과이다.

우리 교회학교 어린이에게 그의 친구가 거침없이 핀잔주려고 예수님을 무시하는 노숙자란 말이 만약 나그네라고 스스로 표현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아는 어린이였다면 반대로 예수님을 변호하는 설명을 도리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 좀 더 좁혀 감리회 지도자들이 나그네로서의 삶을 잃어버린 채 자신의 배를 불리는 일에 눈멀어 가기에 이제는 이러한 철부지라 안중에도 두지 않을 어린이를 통해서도 엄히 경고하는 하나님의 음성이라 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노숙자라고 생각없이 뱉은 이 용어는 비단 철없는 그 어린이의 이야기가 아닌 재해석된 시대적 양심의 소리로 들려오는 것만 같다. 비록 이 어린이의 눈에 비춰진 예수님의 왜곡된 인식일지라도 그것은 탐욕에 눈 먼 지도자들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현실에 대한 고발이요 저항인 것만 같아 여운이 짙게 남는다. 못 내 아쉬운 점은 지나고 보니 그 어린이가 왜 예수님을 노숙자라고 불렀는지 되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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