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원수를 사랑하라 (마 5:43~48)
18. 원수를 사랑하라 (마 5:43~48)
  • 주성호
  • 승인 2018.04.3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신구약에 많이 강조되었고 물론 예수님께서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가면서 특별히 교훈을 주신 부분이기도 하다. 예수님 당시 문제가 된 것은 당시 유대인들은 이웃의 범위를 자신의 국가, 가족, 마을에 소속된 자로 규정하다가 드디어는 자신들의 친구로까지 이웃의 범위를 축소시키고 그 외는 원수로 규정하고 적대심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그것을 보시며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가 온전히 주어진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 지난주 말씀에서처럼 소극적으로는 무저항주의에 근거를 둔 교훈을 주셨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천국 시민으로서의 성도의 생활 원리 및 기준은 무저항주의 정도를 뛰어넘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적극적인 사랑에 두셨다. 그리하여 어느 종교도 감히 모방할 수 없는 최고 최상의 교훈을 주셨으며, 이를 시행할 때 율법은 완성되고 성도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강조하셨다.

첫째: 율법과 예수의 사랑

1)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43절)

본문은 구약 레 19:18의 인용이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예수님께서는 마 22:37~40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실 "원수를 미워하라"는 구절은 신구약 어디서나 찾아 볼 수는 없다.
유대인은 이웃을 그들의 민족적 영역에 한정시켰고, 그 외의 이방 나라들은 미워했고 원수 시 했다. 특히 그 당시 율법이 율법사들에 의해 그릇되이 추론되어 해석되고, 실제로 그런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강하게 지적하신 말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율법에서 말하고 있는 원수는 하나님의 성품과 반대되는 이방인들의 가증스러운 행위를 가리켰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모든 이방인 모두를 원수시 했다.

2) 원수를 사랑하라(44~45절)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여기에 나온 '사랑'이란 단어는 '아가파오'(agapaw)로서 필레오나 에로스의 사랑으로는 절대 불가한 것이다. '원수'는 일신상의 원수로서 우리를 미워하고 해를 입히며, 실제로 괴롭히는 자를 뜻한다. 그런 자들을 어떻게 사랑하란 말인가? 율법으로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없다. 인간의 의지로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로만이 가능한데 이것은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상에서 본을 보이시므로 입증하셨다. 23:34에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 것이다.

비록 원수는 우리를 괴롭히는 일을 계속하고 있지만 성도들은 그들을 위하여 계속 기도해야 되는데, 그들이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이 같은 사랑과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고, 아가페의 사랑을 소유하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이 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앙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 가능하다. 이 같은 수준이 될 때 소극적인 방법인 보복을 하지 않거나 무저항주의를 뛰어넘어 아가페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45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렇게 못하면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자녀라 말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사실 예수 믿으면서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45절 하반절을 보면 하나님은 태양을 악인, 선인 가리지 않고 비취며 하나님은 비를 악인, 선인 가리지 않고 내리운다. 그런데 인간들은 사람을 상대하는 층을 두고 대하는 양상도 가지각색이다.

둘째: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46~48절)

1)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46~47절)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세리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세리는 그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천시 받았고 매국노, 강도, 하나님께 대한 반역자로 여겼다. 심지어 세리는 면허증 가진 강도란 말까지 서슴지 아니했다.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가장 천대받는 세리도 할 수 있는 것, 즉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뜻이다. 47절에서는 "형제들끼리 문안하는 것은 믿지 않는 이방인들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마 15:26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의 일반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요 성도인 우리는 세리나, 이방인들이 사는 수준과 그 정도로 살 수 있는가? 성도는 그 수준을 하나님의 수준에 두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생활 규범이요 기독교 윤리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처하면서 하나님이 성품을 나타내는 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세리나,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2) 아버지와 같이 온전하라(48절)

신 18:13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고 말했다. 예수님도 본문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온전함 (teleio") 이란 마 24:6에 의하면 시간적으로는 '끝'을 말하고. 고전 14:20에 의하면 내용적으로는 '충만'을 말하며, 약 1:4에 의하면 동작 면으로 '완성'을 말한다. 과연 육신을 가진 인간이 온전할 수 있는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까지 했는데, 주님께서 원하는 온전함은 이미 모두 얻었다는 뜻이 아니고 자기의 부족을 느끼며 온전을 향해 부단히 달리는 노력인 것이다. 평생 이 마음가짐 정신으로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한다. 바울은 빌 3:12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고 고백하였다.
완전하지도 못하고, 완전할 수도 없지만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내 모습 그대로 최선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무이며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룰 수 있는 특권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