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화평케 하는 자의 복 (마 5:9)
9. 화평케 하는 자의 복 (마 5:9)
  • 주성호
  • 승인 2018.02.26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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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실 때마다 반복되는 것은 '좋았더라' '좋았더라' 그리고 마지막 인간을 창조 하셨을 때는 '참(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다. 그런데 최초의 인간 아담이 범죄한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 났으며, 가인의 첫 살인 이후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사람을 서로 죽이는 피의 역사가 반복되었다. 그리하여 이 땅에는 화평보다 다툼과 분쟁이 계속되었고 고통과 탄식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평화를 부분적으로라도 원했으나 결코 평화를 얻지 못하는 인간들을 위하여.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본문의 선언을 하셨다. 어쩌면 이 세상은 화평을 추구하는 자보다는 힘으로 욕구를 충족시키는 자들이 오히려 득세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길지는 못했고, 약해 보여도 평화를 추구하는 자들이 결국은 복을 받게 됨을 보게 된다.

첫째: 화평케 하는 자

1) 화평이란?
구약에서의 화평은 '샬롬'인데 이것은 강한 종교성을 가지고 있는 단어로서, 국가간이나 개인 관계에서 우호적인 관계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왕하 20:19; 슥 6:13).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인사말이 되었다. 이스라엘 여행 중에도 많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많은 어려움을 당한 민족이므로 종말론적인 의미로도 사용하였다. 사 2:2~4을 보면 이스라엘이 시온에 모이고 "무리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낙원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다. 슥 9:9~10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메시야가 작은 나귀를 타고 오는데, 그것은 땅 끝까지의 화평을 위한 것이라 했다.

사 9:6에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 임이라"는 예언이 기록되어있다. 신약에서는 화평(eijrhnopoiov") 이 단순히 자기 마음속에 화평을 가진 자(어거스틴), 평화로운 자, 또는 화평을 사랑하는 자 등의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정도의 의미로 말씀하시지 않고 화평을 적극적으로 조성하는 자(peace maker)의 의미로 사용하셨다.
화평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죄가 제거되므로 성취되는 화평이다. 그 다음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은 적극성을 가지지 않으면 쉽게 되지 않는다. 대신(對神), 대인 관계에서 온전한 화평이 이루어질 때 악이나 불화의 요소가 없는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 나라가 이룩된다. 또한 대신 관계가 이룩되어야 대인 관계의 평화가 성취된다. 그러므로 신앙이 전제되지 않은 평화는 진정한 화평이 되지 못한다.

2) 화평치 못한 이유
인류는 역사시대에 들어서면서 어느 한 시대라도 싸움이 그친 날이 없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최초의 살인 사건은 형이 동생을 쳐 죽이는 일이었으며, 이것으로 시작하여 인류의 역사를 피의 역사로 만들고 말았다. 시간이 갈수록 악은 누적되고 그렇게도 많은 평화 회담이 오고 갔는데도 진정한 평화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국가적, 정치권, 개인적 모두 마찬가지다. 실제로 불신과 증오로 가득 찬 이 세상은 분쟁과 다툼의 연속 속에서 평화를 구실삼아 전쟁을 일으키고 안녕을 빙자하여 분쟁을 조성했다.
이러한 다툼과 분쟁의 근원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의 요인이 건재하고 있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 죄는 그냥 놔둔 채 겉으로 보이는 제도 문제를 가지고 평화 하려고 하니 될 리가 없다. 근본 문제인 죄를 그냥 둔 채 아무리 회의를 거듭해도 실마리는 풀리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성도와 교회가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이룩되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죄 문제의 처리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 십자가로 해결해야 한다.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② 십자가의 피로 해결해야 한다.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런데 이 세상은 죄악이 주장하고 있기에 기독교는 불의와 비진리와 싸울 수밖에 없다(마 10:34~38).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 됨

1)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 1:12~13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니라"고 하였다. 영접하는 실제적인 방법은? 믿음이다. 갈 3:26은 "너희가 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했다. 믿음이 없이는, 믿지 아니하고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갈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렇다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는 어떤 특권을 가지는가? 한마디로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다.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4:7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문 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더 이상 죄의 종이 될 수 없고 아들의 영을 힘입어 화평케 하는 자가 된다.

2)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음
하나님의 아들의 특징은 불화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화평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화평케 하는 자가 받는 복을 받게 되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당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반대로 화평을 깨뜨리는 자는 하나님께나 사람들에게도 멸시를 받고 저주를 받아 멸망하도록 되어 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을 닮아가는 생활이 가능하며 하나님께 뿐 아니라 사람과도 화평을 누리게 되며,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구나'라는 일컬음을 받는 복된 생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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