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중매도 목회의 일부다
결혼중매도 목회의 일부다
  • 민돈원
  • 승인 2016.06.1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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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과 2장을 읽다보면 매우 특이한 문장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1장에서 7번이나 반복되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6회),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1회)라고 기록된 창조역사이다.

그러다 2장에 들어와 “...좋지 아니하니”(18절)라는 정반대의 분위기로 반전되고 있다. 그 이유가 “...사람이 혼자 사는 것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바로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고 했고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나는 이 문장을 이렇게 바꾸어 보았다.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고, 하나님 디자인하신 의도와 달랐을 때 좋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할 뿐더러 나아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고 아니 그렇게 사는 것은 결국 좋지 못한 방식이라는 뜻이다. 이후로 죄가 들어오면서 아담과 하와가 함께 살 수 없었고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었다. 이 뿐인가? 가인이 아벨과 함께 살 수 없었고 결국 하나님과 함께 살지 못하고 떠나 버렸다. 그에 반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고 노아 역시 하나님과 동행했다. 이들을 가리켜 신약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기록한다.

이런 점에서 목회는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의 의도하신 뜻을 사람들에게 해석해 주기 위해 가교 역할 하는 중요하고 막중한 사명을 가진 자들이 할 수 있는 성역이기에 두렵고 떨리는 일이면서 동시에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최고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그 중에서 남녀가 결혼하도록 중매하는 일을 잘 할 수 있는 일이야말로 빼놓을 수 없는 목회 사역중의 하나이다. 진주에서 목회할 때 40줄에 들어선 노총각 집사에게 당시 서울에 사는 자매를 중매해서 결혼주례까지 선 적이 있다.

현재 교회 성도들 중에도 40이 넘은 노처녀 노총각이 있어서 담임목사로서 조심스럽게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다. 마침 동문회 때 만난 총각 목사님을 한 자매에게 연결하는 중에 있고, 또 한 자매는 아내를 통해 다른 지역의 한 형제를 연결 중에 있다. 성사되는 일이야 두 사람 당사자에게 달려 있긴 하지만 이에 중매해주는 입장인 우리로서는 그들 부모나 당사자가 좀 더 적극적인 제스처가 필요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긴 하다. 40이 넘은 총각 처녀를 중매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지난하다 할지라도 해야 할 일이다.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말씀을 새겨본다면 마냥 늦추고 두고만 볼 일도 아니다. 목사인 나로서도 목회 사역중에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보신 하나님의 말씀을 감안하면 이를 좋게 만들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책임적인 사역이라 생각하니 두 어깨가 무겁기만 하다.

따라서 세간에 미혼(未婚)이 아닌 신조어로 등장한 비혼(非婚) 트렌드의 역리를 순리로 다시 바꿔야 할 책임이 목회자의 사명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결혼에 대한 거부는 하나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더 좋아져야만 한다. 그것을 유물적인 사관의 논리나 세속적인 역사관인 물질적인 풍요로만 해석한다면 그런 곳에서 더 이상의 희망은 기대할 수 없다.

결혼은 하나님이 좋지 못한 것을 좋게 만드신 제도이다. 따라서 목회역시 하나님 뜻과 그의 디자인 계획을 잘 해석해주는 사역이라 한다면 사람들에게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만들어야 할 책임을 가지고 무거운 짐을 풀어 주어야만 한다. 바꿔 말하면 교회는 사람들에게 좋게 만들어주어야 할 중책을 떠맡고 있다. 그런 점에서 목회하는 한 미혼 남녀 결혼을 위해 중매하는 일은 신중하면서도 계속 해야 할 것 같다. 결혼하는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다.

예수님 제대로 믿으면 믿을수록 더 좋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좋지 않던 사람도 좋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빠지면 큰 문제이다. 누구의 문제라고 탓할 것도 없다. 탓하지도 말라. 그 이유는 말씀대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과 같이 혼자 살려하기 때문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무의식적이든 의도적이든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를 면밀히 그리고 겸손한 자세로 나를 들여다보면 이에 대한 해답내지는 음성이 들리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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