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감 꽃재교회, 창립 제119돌 맞아 3.1절 제105주년 기념 성극 예배
기감 꽃재교회, 창립 제119돌 맞아 3.1절 제105주년 기념 성극 예배
  • 김오채
  • 승인 2024.03.05 11: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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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독립운동가 이필주 목사와 이규갑 목사, 유관순 열사, 박인석 장로 신앙 여정과 민족정신 성극으로 승화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성동광진지방회 꽃재교회(담임 김성복 목사)는 3.3(주일) 11시 교회창립 119주년을 맞아 민족교회로서의 정체성과 3.1절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란 주제로 독립운동가 이필주 목사(제2, 4, 10대 담임)와 이규갑 목사(제14대 담임), 유관순 열사, 박인석 장로의 신앙 여정과 민족정신을 승화하는 성극예배를 드렸다.

기감 꽃재교회, 창립 제119돌 맞아 3.1절 제105주년 기념 성극 예배
기감 꽃재교회, 창립 제119돌 맞아 3.1절 제105주년 기념 성극 예배

 

기감 꽃재교회, 창립 제119돌 맞아 3.1절 제105주년 기념 성극 예배
기감 꽃재교회, 창립 제119돌 맞아 3.1절 제105주년 기념 성극 예배
기감 꽃재교회, 창립 제119돌 맞아 3.1절 제105주년 기념 성극 예배
기감 꽃재교회, 창립 제119돌 맞아 3.1절 제105주년 기념 성극 예배
기감 꽃재교회, 창립 제119돌 맞아 3.1절 제105주년 기념 성극 예배
기감 꽃재교회, 창립 제119돌 맞아 3.1절 제105주년 기념 성극 예배

►100년이 넘는 교회 역사 가운데 민족교회로서 독립운동에 힘쓴 꽃재교회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필주 목사(제2, 4, 10대 담임)를 필두로 신앙과 교육, 민족의 독립에 앞장선 교회였고, 일제치하 속 옥고를 치르면서도 신사참배에 저항하며 교회의 정체성을 지켜나간 이규갑 목사(제14대 담임), 평신도 사역자로 동역한 박인석 장로 등이 시무한 교회이다. 또한 믿음의 선배들을 통한 신앙교육과 함께 야학과 여학교를 통한 여성 인권과 교육에 앞장선 꽃재교회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많은 여성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이러한 민족교회의 역사를 담아내는 꽃재교회 3.1절 성극예배는 믿음의 선배들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운 3.1 운동 정신을 지금 우리 시대에 전하는 계기와 한국교회가 가진 역사적 자긍심을 기리고, 그리스도 복음의 빛을 전파하는 교회의 사명을 다시금 세우는 기회가 되었다.

►3.1절 제105주년 기념 성극예배는 김성복 담임목사의 설교와 30여 분간 진행된 성극으로 구성되었다. 연출은 성동구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재직 중인 황정원 권사(꽃재교회)가 맡았고, 교회학교 아이에서부터 시무장로까지 전 세대가 걸진 온 교우가 함께 출연하여 이필주 목사와 유관순 열사의 독립운동과 일제의 탄압과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낸 이규갑 목사와 박인석 장로 등의 교인들이야기를 생생한 극으로 담아냈으며 어둠과 아픔의 역사 속에서 빛으로 부르심에 일어나 빛을 발하는 순종으로 민족의 독립을 이뤄낸 한국교회의 역사를 오늘의 성도들에게 도전을 불러일으켰다.

기감 꽃재교회, 창립 제119돌 맞아 3.1절 제105주년 기념 성극 예배
기감 꽃재교회, 창립 제119돌 맞아 3.1절 제105주년 기념 성극 예배
설교-김성복 목사
기감 꽃재교회, 창립 제119돌 맞아 3.1절 제105주년 기념 성극 예배

♠이필주 목사(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1869-1942)

“만일 나 하나가 죽어 우리 민족 전체의 자유가 회복된다 하면 이 몸이 열 번이라도 죽고 백번이라도 죽어 저의 자유를 얻게 하겠다. 그는 조금도 사양치 않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찾지 않고는 무슨 일이던지 할 수 없음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야 비로소 우리 민족을 위하여 일할 바를 알 것이다.”라고 하신 꽃재교회의 제2, 4, 10대 담임목사이자,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1인이며, 일제시대 대표적 항일 민족 운동가인 이필주 목사는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자진하여 1890년에 구한국 군대에 입대하여 부교(副敎)까지 진급하였다. 한편 1897년 29세에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으나, 1902년 어느 날 전염병으로 한꺼번에 자녀들을 모두 잃고 인생의 허무함을 깊이 체험하며 심한 고통에 빠졌다. 당시 이 깊은 수렁에서 그 모든 죽음과 고통의 책임을 자신의 죄책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예수교를 믿으면 무슨 고난을 당하든지 안심이 되고 위로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1902년 상동교회를 찾아가 입교하였다. 1903년 강한 확신과 더불어 그 해 4월 미감리회 스크랜턴(W.B. Scranton)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그해 가을에 군을 제대하여 전도사업에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 상동교회에서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며 개인전도에 열중했고 1904년 사경회 공부를 끝내고 속장이 되었으며 그해 여름에는 권사가 되었다. 전덕기 목사가 청년학원을 설립하자 동 학원의 체육담당 교사가 되고 1904년부터 공옥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1907년 신민회 활동을 하며 민족운동을 펼침과 더불어 청파동에 기도처를 마련, 교회로 발전시켰으며 그 해 4월에 전도사 직첩을 받았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신민회가 발각되어 주요 인사들이 대거 피체되는 상황에서 40이 넘은 나이에 1911년 협성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2년 과정을 마치고 1913년 3월 지방회에서 파송을 받아 왕십리교회(현 꽃재교회)에서 5년간 시무하였다. 1915년 4월 25일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고, 1918년 6월에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정동교회로 전임, 시무하였다. 1919년 3.1운동의 사전계획에 깊숙이 가담하였고 전덕기 목사 이후 사실상 감리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기에 감리교회의 대표로 33인에 참가하였다. 독립선언식 거행 직후 체포되어 1920년 10월 30일 결심공판에서 2년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투옥되어 모진 형고를 치렀고 1921년 11월 4일에 가서야 석방되었다. 출옥 후 목회활동에 전념하여 미아리교회와 인근 3개의 교회를 맡아 시무하였고 1922년 9월에는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고 연화봉교회(현 청파교회)를 맡았다. 또한 협성신학교, 이천ㆍ천안 등지에서 개최된 교역자회의 강사로 참석, 큰 감동을 주었고 그 지도적 위치를 감당했다. 1934년 3월 왕십리교회(현 꽃재교회)에서 은퇴하였고, 은퇴 후에는 수원지방의 남양교회에서 원로목사로 남아 교회를 돌보았다. 일제 말기 가중된 신사참배 강요와 태평양 전쟁으로 기독교와 민족의 시련이 극심하여 적지않은 기독교 인사들이 변절해 갈 때에도 지조와 절개를 지켜 나갔다. 교회탄압에 맞서 꿋꿋이 투쟁하던 중 해방을 몇 해 앞둔 1942년 4월 21일 별세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규갑 목사

3.1운동과 임시정부, 신간회 활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로 특히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으로 인하여 일제의 수탈과 신사참배 강요 등 탄압이 극심했던 시기에 1941년부터 해방 전까지 제14대 꽃재교회 담임목사였다. 혁신교단 체제 아래 노골적인 친일행각이 자행되던 때에 일본어 사용을 거부하고, 궁성요배나 국민서사낭독을 거부하는 등 신앙을 지도하고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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