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의 참 길, 세계평화의 지평을 열어가는 대도대기 패러다임
한국기독교의 참 길, 세계평화의 지평을 열어가는 대도대기 패러다임
  • 곽일석
  • 승인 2023.09.02 16: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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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국기독교는 조선인으로서 주체적인 자각 위에서 서구 문명과 기독교를 수용하였다.

우리는 진공 속이 아니라 주어진 한 시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생명 진리를 믿고 받아들이며 세상에 전하여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가는 선교활동을 펼쳐나간다. 우리가 몸담고 숨 쉬고 있는 이 땅의 시대는 고정된 죽음체가 아니라 살아서 역동하며 변하는 생명체이다.

19세기 말 개화기에 한국감리교회가 형성 된 이후 지난 시대를 통해 우리가 그 틀 위에서 살아온 신앙생활과 교회운영의 패러다임은 세 가지였다. 말하자면, 한국감리교회의 제도와 구조의 기본 틀은 세 번에 걸쳐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개화기에 형성된 첫 번째 틀은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주로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과 선각적인 한국감리교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당시 조선은 19세기 세도정치의 부패와 서구 근대문명의 충격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고, 끝내 그 큰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이 개화기의 위기와 일제시대의 시련을 이겨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가는 희망의 그리스도인들과 사랑과 평화의 신앙공동체로 출현한 것이 한국감리교회였다.

1884년 멕클레이 선교사가 고종을 만나 선교의 문을 열고 1885년에 들어온 미국 북감리교회와 1895년에 들어온 미국남감리교회는 아펜젤러와 스크랜튼과 리드와 하디 같은 선교사들의 큰 수고와 헌신이 있었다. 또한 최병헌과 노병선과 전덕기 같은 선각적인 조선감리교인들의 헌신으로 이 땅에 뿌리내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전파했다.

전덕기는 당시 조선의 위기 현상을 ‘삼천리 땅에 이 천만 생령들이 삼 천년 깊이 든 잠을 자고 있는, 코고는 상태’로 파악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는 목소리로 … 나라를 칼로 방호하지 않고 사랑과 화평의 병기로 방호“한 깬 사람으로 민족운동과 현대 한국의 영적인 초석이었다.

“지금 우리나라 삼천리 너른 땅에 이 천만 생령들의 코고는 소리 천지를 진동하여, 삼천년 깊이 든 잠을 누구라서 깨워볼까. 원수는 처처에 일어나서 잠든 사람을 보는 대로 사지를 결박하여 놓았으니 혹 그 후에 잠을 깰지라도 자유 활동은 할 수가 없도다. … 이런 때를 당하여 누가 … 자기 몸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힘을 다하여 잠든 형제를 깨워 주리요. … 누구든지 성신의 감화하심을 받은 자라야 할지니. 만일 성신의 힘을 의지 하지 않고 사람의 힘과 이 세상이치로 잠을 깨워주려 할 것 같으면, 그 육신의 잠은 깨울 수 있더라도 영혼의 든 잠이야 어떻게 깨 울 수 있으리오.”

여기 전덕기의 말처럼, 개화기 제 1세대들에 의해 개척 된 한국감리교회는 우리나라 삼천리강산과 전 동포겨레의 영혼을 흔들어 깨워 내우외환의 위기를 극복하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그리스도의 몸 된 신앙공동체요 성령의 공동체로 이 땅에 출현했다. 적어도, 삼천년 깊이 든 영혼의 잠을 각성시키고 삼천년 묵은 땅을 갈아엎으면서 미래 삼천년을 밝히려는 비전을 품고 제 2의 동방의 등불로 떠오른 한국감리교신앙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개화운동과 독립운동, 민족목회와 만주선교에 헌신했던 해석(海石) 손정도 목사는 “이 세상이 생겨난 후에 인류에게 가장 비참한 일은 전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그러나 이 세상에 전쟁을 억누르고 평화를 얻으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음부의 권세를 근본적으로 파멸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 와서 깨달은 사람마다 자기 몸을 희생해서라도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자 했습니다. 공자도 그런 사람이고 석가도 그런 사람이고 모하멧도 그런 사람입니다. 그들의 행함에도 많은 효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음부의 권세를 이기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세상을 이기고 음부의 권세를 멸한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라고 했다.

이렇듯 초기 한국감리교회의 내적 모형은 대도대기(大道大器) 패러다임으로 부를 수 있다. 한국감리교의 지성인들은 기독교를 자신과 민족과 세계구원의 새로운 길로 수용하면서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의 본질과 위상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대도대기 패러다임의 한국감리교회와 개신교 맥락에서 이후 결정적인 때 역사의 요청에 응답했으니, 천도교와 불교와 뜻을 같이하고 협력해서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조선의 선각적인 신앙인들은 흔히 생각하듯이 선교사들의 서구중심적인 일방적 사유 방식으로 기독교 복음을 이해하지 않았다. 기독교를 단순히 서양종교로 인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동양과 조선의 현실을 치열하게 파악하고 자기 주체성을 지닌 자각 위에서 한국기독교의 길을 개척해냈는데, 그것을 “대도대기(大道大器) 패러다임”이라고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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