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02
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02
  • 안양준
  • 승인 2023.08.09 1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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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속에서

“일종의 감금 상태를 또 다른 감금 상태에 빗대어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합당한 일이다.”

알베르 카뮈가 쓴 소설 「페스트」의 서두를 장식하는 글이다.

알제리의 오랑을 배경으로 페스트가 발병하고 수많은 사망자가 속출하며 도시 전체를 위협하는 무서운 전염병에 맞서는 인물들을 소설 속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카뮈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만큼 이 소설이 대단한 작품 임에 틀림없지만 작품 속에서 장문의 설교를 늘어놓는 파늘루 신부를 통해 카뮈의 기독교적 지식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언젠가 무신론자임을 자처하는 이들과의 대화에서 “이런 기독교적인 방대한 지식을 갖추고도 어떻게 실존주의 철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돌아온 대답은 “카뮈가 신앙이 없었다고 생각합니까?”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신론자들이 말하는 신앙이란 무엇일까?

얼마전 Covid-19가 발병하고 사람들 사이에 위기로 다가올 때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의 앵커가 코로나 사태를 주시하며 ‘불안과 불만’을 정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진단을 받을 수 없어 자신의 전염되었는지 여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을 ‘불안’이라고 한다면 그런 것들이 충족된 상태임에도 자유롭지 못한 상황을 가리켜서 ‘불만’이라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은 상당히 뛰어난 방역조치로 인해 감염 여부는 물론 백신 접종까지 불안해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물론 다른 나라들의 경우는 다를 수 있습니다) 불안요소가 사라졌다고 불만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백신 패스 등 여러 가지 사회적 현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 함께 나눈 대화를 통해 모든 이들에게 공존하는 불안이나 불만에 대해 알게 되었고, 신적 존재를 부정함에도 그들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신앙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페스트」의 서두에 등장하는 문장은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다니엘 디포의 말이다. 

카뮈는 일종의 감금 상태를 페스트로 생각하고 또다른 감금 상태는 자신의 정신적인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에 빗대어 표현한다는 말은 무언가 보이지 않는 신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너무 주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해석이라 치부할 수 있겠지만 소설 속에 타루라는 인물이 의사 리외에게 “선생님 자신은 신도 믿지 않으시면서 왜 그렇게까지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시는 건가요?”라고 질문하는 내용은 충분한 증거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이 질문은 실존주의자였던 알베르 카뮈가 자신을 향해 수없이 던졌던 질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거의 언제나 무지함에서 비롯되며, 또 선의도 교양을 갖추지 못했다면 악의와 마찬가지로 많은 피해를 줄 수 있다. 인간은 악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선한 존재지만, 사실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다소 무지한 법이다. 그것은 우리가 미덕이나 악덕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는 무지다.”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무지라고 외치는 카뮈의 부르짖음은 평상시에는 충분히 무시될 수 있는 견해이겠지만 이를 깨닫는 순간에는 이미 경고등이 켜진지 한참 후의 상황이라 할 것이다.

“우리 시민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못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들은 겸손할 줄을 몰랐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재난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추측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은 사업을 계속했고, 여행 떠날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미래라든가, 여행이라든가, 토론 같은 것을 말살하는 페스트를 어떻게 그들이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다. 재난이 있는 한 아무도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들에게 닥친 절망적 상황이 겸손하지 못했던 까닭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절망적 상황이 되어버린 후에는 자신들이 누리던 자유가 침해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언젠가는 인간에게 불행과 교훈을 갖다 주기 위해서, 페스트가 또다시 저 쥐들을 깨워 어떤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치 카뮈가 예언하듯 「페스트」라는 명칭이 ‘코로나’로 바뀌었지만 결국은 바이러스가 온 세계를 뒤덮었고 수많은 이들이 불안해 하고 또다른 불만을 터뜨리는 상황을 겪으며 이제 무언가 새로운 국면에 다가서는 듯한 조짐을 보이는 시점에서 한 사람의 불신자였던 알베르 카뮈가 썼던 글들을 천천히 음미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코로나 정국에서 기독교는 어떤 해답을 제시했었는가?
그들의 불안을 어떻게 해소하고, 그들의 불만을 어떻게 잠재울 수 있었는가?

「페스트」에서 파늘루 신부는 출애굽기의 말씀을 들어 설교하였다. 당시 절대 권력을 지닌 이집트의 파라오를 굴복시키기 위해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내용이다. 당연히 회개하라는 메시지이고 소설에서도 모든 청중들이 이내 무릎을 꿇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지혜롭다고 자처하던 자들이 공포와 절망의 순간에 할 수 있는 것은 회개 밖에 없다는 것….

그런데 왜 이리 마음이 무거운지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죽음의 덫에 걸린 한 마리 짐승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줄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심정으로, 누구나 주님 앞에 철저히 무릎 꿇고 회개해야 함을 알면서도 우리가 사는 시대에 기독교는 이를 당당히 외치지 못한 부끄러움 때문일 것이다.

무신론자들이 말하는 신앙, 그들이 찾는 신에 대해 ‘막연한 누군가’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들을 위기 앞에서 구해줄 수 있는 ‘누군가’라는 존재 앞에서는 그들은 무신론이 아닌 분명 믿음을 지닌 자들이다.

많은 이들이 죽어나가는 절망의 현장에서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렇게까지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들이 갖고 있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을 유일하신 하나님,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전능자이신 하나님께로 바로 이끌어야 할 사명을 지닌 성도들이 그들 앞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하였는가 하는 물음표를 던지는 것이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그때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였고, 사사도 있었으며, 제사장과 레위인이 분명히 존재했음에도 누구나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기에 암울한 시대가 되었던 것처럼 교회가 없거나 목사가 없었기에 방황하는 수많은 이들을 건져내는 역할을 못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의 진리를 믿는 자들이 스스로 버린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군림하는 자세로 자신들의 주장을 외치는 모습은 믿지 않는 자들의 눈에 먼 나라 사람처럼 보일 뿐이다. 아이가 아플 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부모의 심정으로 누구보다 먼저 무릎꿇고 회개하는 것만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해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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