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번역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성서번역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 KMC뉴스
  • 승인 2022.07.12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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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시리즈 “길을 찾다”는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만나는 고민과 질문들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기 위해 감리회목회자 모임 <새물결>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이 작업이 목회자와 평신도의 균형 잡히고 건강한 믿음의 바탕을 마련하는데 밑거름이 되고,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발걸음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두 번째 연재를 이어갑니다.

성서번역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이사야 교수(남서울대학교/구약학)

〈질문〉성서는 구약기준으로 3천년전에 쓰여졌고 개역성경도 우리나라 개화기에 번역이 시작된 성서버전입니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는 구(舊)어체와 문(文)어체에 매여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주는가요? 과거에 기록된 성서를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거나 읽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이사야 교수

질문자님이 성서라는 말과 성경이라는 말을 함께 사용하셨는데, 저는 성경이라는 말로 통일해서 사용할까 합니다. 우선 ‘번역은 반역(半譯)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우며, 완전한 번역이란 사실상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표현해줍니다. 바빌론 탈무드에는 “기록된 성경구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는 사람은 거짓말쟁이고, 의역하여 풀이하는 사람은 신성모독자이다”라는 말이 있고(M. Silva, “God,” Language and Scripture, vol.4, Apollos, 1990, 134. ), 미크(T.J. Meek)라는 학자는 “분명, 세상에 있는 모든 책 중에서 히브리 성경을 번역하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Theophile J. Meek, "Translating the Hebrew Bible," JBL 16, 141.). 그만큼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 고되고 힘들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고 해도 번역은 꾸준히 이어져야 합니다.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그 언어를 사용하는 번역 또한 바뀌어야만 합니다. 질문자님이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 성경에는 옛 표현, 문어체투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옛 책인 성경를 더욱 예스럽게 만들지요. 하지만 이 예스러움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잠깐 우리말 성경 번역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볼까요?

최초의 우리말 성경은 1882년에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목사가 출간한 <누가복음>입니다. 구약성경의 경우는 1898년에 알렉산더 피터스목사가 시편 150편 중 62편을 번역한 <시편촬요>가 효시입니다. 신구약성경 전체가 출간된 것으로는 1911년에 완성된 <성경전서 개역한글판>가 처음이었고, 1938년에 한 차례 그 번역이 다듬어 출간되었습니다. 이 성경을 보통 <개역>이라고 부르지요. 그 후 <개역>은 1952년과 1956년에 걸쳐 당시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따라 다시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1998년에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이 출간되었지만, 그 바탕에 깔려있는 문장은 기본적으로 1911년의 문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전히 구어체적인 느낌이 묻어날 수밖에 없지요. <개역>이 구어체적인 느낌을 주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것은 번역 원칙 때문입니다. 성경 번역은 어떤 원칙을 따르느냐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집니다. <개역>은 대체로 직역(literal translation)과 형식적 일치(formal correspondence)라는 원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원천언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단어와 문법, 관용구들을 수용언어인 우리말에도 적용한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그 뜻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1977년도에 출간된 <공동번역>은 직역과 형식적 일치를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공동’이라는 이름은 카톨릭과 개신교가 공동으로 번역하고 사용하자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공동번역>에 적용한 번역 원칙은 무엇일까요?

「공동번역 성서」(1977)의 번역 원칙은 내용 동등성을 추구하고 형식 일치를 피하는 것이었고, 번역 지침은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위한 용어로 번역하고 신교나 구교 어느 편의 익숙한 표현은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971년 4월 「공동번역 신약전서」가, 1977년 4월 「공동번역 성서」가 출간되었다(https://www.bskorea.or.kr/bbs/content.php?co_id=subpage2_3_3_1_9).

내용 동등성(dynamic equivalence)입니다. 원천언어보다는 수용언어인 우리말에 그 무게를 두고, 의미와 뜻을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지요. 하지만, <공동번역>에 대한 개신교 교인들의 반응은 의외로 뜨겁지 않았습니다. 마치 소설책 같은 어투 때문인지 여전히 <개역성경>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성경은 세상의 다른 책과는 구별되는 느낌이 있기를 기대했는데, 그 느낌이 부족하더라는 반응이었던 것 같습니다. 의미와 뜻을 중시하다 보니 원문에는 없는 단어를 두고 논쟁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워낙 번역작업과 감수 기간이 짧았던 터라 미숙한 번역들과 오역, 심지어 단어나 구가 빠진 경우까지 발견되었습니다. 수 차례의 개정 작업을 거쳐서 지금은 그 부분들이 모두 수정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개정작업에는 끝이 없지만요.

1993년에 출간된 <표준새번역>은 <개역>의 형식적 일치와 <공동번역>의 내용 동등성 번역의 단점들은 버리되 장점들은 살려서 번역하고자 한 시도였습니다. 일종의 절충식 번역원칙을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표준새번역」에서는 원문의 뜻을 우리의 어법에 맞게 표현하려 하였다. 그래서 형식을 일치시키는 번역을 해도 우리의 어법에 맞고 원문과 똑같은 뜻을 전달할 수 있을 때에는 그렇게 번역을 하였고,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전혀 딴 뜻이 전달되거나 아무런 뜻도 없는 번역이 될 때에는 뜻을 살리는 번역을 하였다. 구체적인 번역 원칙 및 지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10대와 20대, 그리고 우리말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현대어로 번역한다. 원어의 뜻을 분명하게 파악한 다음에, 그것을 우리의 어법에 맞게 표현한다. 번역 본문에서 번역어투를 없애고, 우리말 관용구를 활용하여 원문이 뜻하는 바를 우리말로 분명하고 정확하게 번역하며, 더 나아가서, 우리말을 쓰는 신도들이나 독자들이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한다...(https://www.bskorea.or.kr/bbs/content.php?co_id=subpage2_3_3_1_11)

원천언어와 수용언어를 동시에 중시하는 중간적 입장을 취한 겁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중간적 입장은 의외로 여러 사람의 걱정과 반발에 부딪쳤습니다. ‘딴 뜻’이 된다거나 ‘아무런 뜻도 없는 번역’이 된다는 것은 특정인이나 집단의 신앙과 신학적 배경과 결합될 수 있고, 원문의 의미란 항상 신학적 판단을 거쳐 결정되기 때문에 ‘뜻을 살리는 번역’은 번역자의 신학과 신앙적 취향에 따를 수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형식적 일치와 내용 동등성이라는 두 가지 가능한 번역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가에 대한 대답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쪽의 장점은 다른 한 쪽의 단점이 되고, 한 쪽의 단점은 다른 한 쪽의 장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형식적 일치의 번역은 원문의 단어와 문법을 비슷하게 나타내는 장점은, 우리말의 어법상 익숙한 표현이 아니라는 단점이 있고, 내용 동등성의 번역은 우리말의 어법상 더 익숙하고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원문의 체계를 많이 이탈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성경 번역에 관해서, 최근에 들려오는 참 반가운 소식이 있습니다. <새한글성경>이라는 새로운 우리말 성경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아직은 신약성경과 시편까지만 출간되었지만 (2021년 11월), 구약 번역도 거의 완료한 상태로, 곧 완전한 형태의 새 우리말 성경을 기대해 볼만 합니다. 이 소식이 반가운 이유는 여기에 적용된 번역 원칙이 완전히 새롭기 때문입니다. 한번 살펴볼까요?

언어의 변화뿐만 아니라 1960년대 후반 이후 ‘디지털 혁명’으로 인한 매체의 변화도 이번 『새한글성경』 번역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휴대폰과 같이 작은 디지털 기기로 보기에 적절하게끔, 산문도 시처럼 행을 바꾸어 번역한 아주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이에 따라 『새한글성경』의 주요 번역 원칙을, 디지털 세대에 맞게 문장을 짧게 끊고 가능하면 50자 내외 16어절 정도로 번역하는 것으로 세웠습니다. 고린도전서의 서두는 이를 반영하여 발신인, 수신인의 이름과 인사말을 의미 단위로 끊어서 번역하였습니다.

대화체도 새롭게 번역하였습니다. 대화문은 상황에 맞는 입말로 옮기며, 한국어 어법에 맞는 높임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중에서도 대중에게 하시는 말씀은 격식체인 하십시오체를, 열두 제자와 같이 친밀한 사이에 하시는 말씀은 해요체와 친밀어를, 적대자에게 하시는 말씀은 하오체를 사용하였습니다.

서신서의 경우에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와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마침꼴을 달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인 로마서는 하십시오체를 사용하였으나, 디모데전후서, 디도서와 같이 바울과 친밀한 사이에게 보내는 편지는 친밀감을 살리면서도 목회자인 상대방을 존중하는 하게체를 사용하였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표기를 쉽게 고친 부분도 많습니다. 한자를 모르고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한자어 대신, 보다 쉬운 한자어나 순우리말을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속량’ 대신 ‘풀어 주심’으로, ‘유월절’ 대신 ‘넘는명절’으로 번역하는 식입니다. 그리고 숫자 표기도 어색하거나 불가능하지 않는 한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여 가독성을 높였습니다.

고유명사 번역은, ‘베드로’와 ‘바울’처럼 너무나 익숙해진 말은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의 음역을 존중하되, 초·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 있는 말은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 규정을 따랐습니다. 특히 그리스어 원어에서 지명이 ‘-아’로 끝나는 점도 고려하여, ‘가이사랴’는 ‘카이사르 황제에게 바치는 도시’라는 그 뜻을 살려 ‘카이사레아’로, 지방 이름인 ‘갈릴리’도 ‘갈릴래아’로 번역하였습니다(https://www.bskorea.or.kr/bbs/board.php?bo_table=saehan&wr_id=7).

번역 원칙을 단순히 원천언어와 수용언어 차원에 국한하지 않고, 디지털 세대의 휴대폰 읽기까지 확대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지 않습니까? 갈릴리 활동을 시작하시는 예수의 말씀을 <개역>과 <새한글성경>으로 비교해서 읽어볼까요?

<개역개정판>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니라

<새한글성경> 그때부터 예수님이 선포하여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회개하십시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와 있습니다!”

저는 <개역>의 번역도 좋지만 <새한글성경>의 번역이 훨씬 은혜롭습니다. 우선, 따옴표 안에 들어있는 예수의 말씀이 대중을 존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이제 우리말 성경번역도 꽤 많이 발전했다고 자부할 만합니다. 그리고 <개역>이 가지고 있는 구어체와 문어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도 충분히 품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뿌리 깊이 남아있는 보수성 내지 집착성입니다. 새로운 번역이 나올 때마다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성경번역에 있어서도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사람일수록 엄격하게 문자적인 번역에 집착하며, 원천언어의 문법과 단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 역으로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일수록 보다 자유로운 번역을 선호하고, 수용언어 입장에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Eugene A. Nida, "Theories of Translation," ABD, 513-515. ). 물론 건설적인 비평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더 나은 발전과 개정을 위해 끊임없이 비평하고 필요한 번역원칙을 찾고 바르게 적용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성경은 번역하기에 쉬운 부분과 어려운 부분이 공존하고 있는 책입니다. 성경은 가능한 쉽게 번역되어야 하지만, ‘쉬운’ 번역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문화권, 언어권에서 기록된 책이기에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사는 우리에게 쉽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원천언어와 수용언어를 모두 살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원천언어도 수용언어도 다 하나님의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언어일 뿐입니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새로운 번역의 시도에는 늘 진통이 따랐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비록 하나님의 계시 전달을 위해 특별히 사용된 언어라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이 사용했던 ‘한 시대의 언어’일 뿐입니다. 기록된 말씀의 의도와 뜻을 지금의 독자에게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고, 사용하는 언어로 꾸준히 번역해야 하는 것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40:8)는 말씀이 있지요. 사람의 언어와 번역된 말씀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영원히 세우는 일은 그 말씀을 번역하고 읽고 바르게 비평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책임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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