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과 기독교
8.15 해방과 기독교
  • KMC뉴스
  • 승인 2021.08.19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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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학 전 임시감독회

특강 이규학 이사장
특강 이규학 이사장

한국크리스챤포럼 이사장
한국복음주의영성연합 이사장
둘셋손잡고 커뮤니케이션 대표

하나님의 구원

성경은 위대한 하나님의 해방의 역사이다./를 기록하고 있다. 첫 번 째 해방은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억압받던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으로 출애굽 한 역사이다. 두 번 째 해방은 바벨론 포로귀환 사건이다. 세 번째 해방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짊어지신 십자가 사건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해방의 하나님이시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고난당하던 우리 민족에게도 해방이 일어났다. 우리 민족의 해방을 가져오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일본의 패망에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조국 땅을 밟으면서 "8·15 해방은 자주적인 독립이 아니다"라고 고백했고, 함석헌 선생이 "해방이 도둑같이 임했다"고 말한 것처럼 8·15 해방은 우리의 노력으로 이룩된 게 아니다. 해방은 외세의 도움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1. 한일합방의 원인

조선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에서 고종의 친정, 갑신정변, 임오군란, 동학혁명, 청일전쟁,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 러일전쟁, 을사조약,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40여년에 걸친 격동기를 거치면서 쇠약해 있었다. 훈구, 사림, 서인, 동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대북, 소북, 시파, 벽파 등의 파벌들과 사화(士禍), 당쟁이 나라를 피폐하게 했다. 성리학 이념에 묻혀 안주했던 누습적인 사고와 고식적인 생활태도가 이미 조선을 폐쇄적이고 배타적으로 만들었다.

오랫동안의 나태한 생활태도 자체가 이미 조선인의 문제의식을 무디게 만들었고, 따라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소화할 수 있는 힘을 길러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 결과 조선은 재빠르게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루어 강국의 체제를 갖추지 못했고, 그럴 의식도 없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도쿠카와의 에도 300년 시대 동안 돈벌고 총 쏘는 공부를 했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문물을 성공적으로 수용했다. 그 시기에 조선은 유교 이념에 매몰되어 있었다. 따라서 부국강병을 소홀히 했으며 자주적 근대화의 기회를 놓쳤다.

2. 한일합방의 과정

한일합방은 경술년에 일어난 나라의 수치라는 뜻의 경술국치로 표현되기도 하고 518년 이어온 조선왕조의 멸망을 의미하기도 하며 36간의 일제강점기의 시작이다.

1) 강화도 조약, 청일전쟁, 러일전쟁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조약이자 불평등조약으로 일본의 조선침탈의 시발점이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개국이후부터 조선에 대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중국의 권리가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1904년 대한제국과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전쟁으로 러시아가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서 러시아마저 대한제국에서 물러났다.

2) 한일협약, 가쓰라-태프트밀약, 영일동맹, 포츠머스조약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에 메가타 가네다로(), 스티븐스()라는 고문을 파견해서 일본이 대한제국의 제정권과 외교권을 장악했고,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에서 무엇을 하던 미국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일본의 가쓰라와 미국의 태프트가 밀약을 했다. 1905년 영국과 일본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영국은 일본이 대한제국에서 가지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이익을 보장하며, 일본은 영국의 인도 지배 및 국경지역에서의 이익을 옹호하는 영일동맹을 맺었고, 그리고 1905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 조약을 맺어 일본이 대한제국에 탈취하는데 크게 일조했다.

3) 을사늑약, 한일합방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일본은 고종을 협박하고 관리들을 매수해서 대한제국의 군사와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 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은 사실상 국권을 강탈당했다. 1907년 일본에 의해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아들인 순종이 즉위하면서 한일신협약(정미칠조약)으로 내정마저 합법적으로 장악했다. 군대를 해산하고, 1910년 6월 종래의 사법·경찰권 이외에 일반경찰권까지 탈취하여 합병전에 마지막조치를 마쳤다. 1910년 8월 16일에는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간의 합병조약이 조인되면서 대한제국은 저항 한번 못해보고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3. 한일합방의 피해

1) 제도적 차별

일제강점기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 예컨대 교육과 직업 선택의 불평등, 사회・법 제도의 불이익, 신민화 정책을 위한 민족 문화의 말살 및 왜곡,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한 강제동원(징병 포함), 산미증식계획 등 병참기지로서의 착취, 민간인 학살과 일본군 위안부 등 전쟁 범죄 문제 등이 얽혀 있는데다가 그 이후의 남북한에 좋지 못한 유산을 수없이 남겼다.

2) 교육의 차별

일제 36년동안 조선인 출신으로 이공학 박사를 받은 인물은 우장춘, 리승기를 포함해 단 12명에 불과했으며, 내지의 제국대학 박사는 불과 2명뿐이었으니 당시 조선인들이 박사가 된다는 것은 희귀한 일이었다. 1944년 한국에 거주하는 인구 중 3%만이 일본인이었으나 종합대학 졸업자의 50%, 단과대, 사범대, 기술전문대 졸업자의 47%, 중등학교 졸업자의 44%, 2년제 중학교 졸업자의 73%가 일본인이었다. 일제는 교육과정에 차등을 두어, 식민지 조선인들이 엘리트 계층으로 진출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틀어막았다.

3) 악습의 수입

일제강점기는 한국과 북한에게 나쁜 유산을 많이 남겼는데, 대표적으로 일본의 이지메 문화와 비슷한 왕따, 군기잡기, 입시 위주 교육, 병영 부조리, 한국 정치의 고질병 중 하나인 비민주적 정당정치 문화가 있다.

3) 경제적 피해

일제에 의해 근대적 경제 시설·기구·제도가 들어서고, 농업 성장을 중심으로 무역 확대와 산업고도화가 이루어졌으나, 사회 전반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매우 컸고, 경제전반에 걸쳐 일본에 종속된, 불완전하고 기형적인 구조를 가져왔다.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의 1인당 GDP는 태평양 전쟁 말기 때의 수탈로 1945과 1946년에는 1910년과 비교해서 1인당 GDP가 1/2에 불과했다.

4) 문화적 손실

경술국치 이후 일확천금을 노린 일본인들은 한반도의 고분들을 상대로 경주와 개성을 중심으로 세계사에 그 유례가 없을 포악무도한 고분 도굴을 자행했다. 그들은 무리를 짓고 버젓이 고분들을 파헤쳤는데 특히 개성은 고려왕조 오백 년의 도읍인 까닭에 왕릉을 비롯해 고대 고분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 고분들은 모두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수호하고 있었던 무덤들이었다. 그렇기에 내부 시설에서 고려자기 같은 부장품은 거의 틀림없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을 고분들을 마구 파헤치고 만행을 버젓이 행한 것이다.

5) 토지조사사업과 토지약탈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자 토지약탈과 식민지착취를 목적으로 1910∼1918년간에 걸쳐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일제는 토지소유권을 재조사하고 토지가격과 지형을 조사한다고 하면서 ① 임야 및 민간인 공유지 약 1369만여 정보, 미간지개간지 약 102만정보, 농경지 13만정보의 토지를 약탈했다. 이것은 당시의 국토면적 약 2225만여정보의 약 62%에 해당하는 방대한 것이었다. 신고를 하지 않거나 신고에 필요한 증빙서류를 다 갖추지 못한 한국농민의 토지는 모두 조선총독부 소유로 약탈당하였다. 또한,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농민의 권리인 ① 관습상의 경작권, ② 도지권, ③ 개간권, ④ 입회권 등을 소멸하였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반봉건적 지주소작제도를 강화시켜 일반농민과 소작농의 처지는 더욱 열악하게 되었다.

6) 민족말살을 위한 식민지교육

일제는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민족말살과 식민지교육을 위한 첫 조처를 자행하였다. 「조선교육령」의 기본내용은 ① 조선인에 대한 교육은 일본제국에 충량(忠良)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하며, ② 일본어를 보급하고, ③ 조선에는 대학을 설치하지 않도록 하고, 필요하면 실업기능교육만 시킨다는 것이었다. 한국어시간을 줄이고 일본어시간을 대폭 증가시켰다. 날조 과장된 일본역사를 강제로 학습시켜 일본숭배사상을 주입시키고, 한국사를 왜곡하고 날조하여 한국민족은 고대부터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받아온 타율적이고 정체적인 민족이며, 오늘날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역사적·필연적 귀결이라는 의식을 주입시켰다. 1910년 11월부터 헌병경찰을 동원해 전국의 서점·향교·서원은 물론 개인집까지 수색해 우리의 고전들을 약탈했고, 그 가운데 약 20만여책을 불태워버리고 일부는 일본으로 실어갔다. 일제강점기에 침략자들이 파괴하고 약탈해간 민족문화 유산들은 대량으로 도저히 그 품목을 낱낱이 들 수 없을 정도이다.

7) 민족산업의 파괴

일제는 한국을 일본공업발전을 위한 원료공급지와 독점 상품시장으로 착취하기 위하여 1910년 12월 29일 이른바 「회사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그 내용은 ① 한국내에서의 회사설립은 반드시 조선총독의 사전 허가를 받도록 하고, ② 허가 없이 회사를 설립한 경우에는 투옥하며, ③ 허가를 받고 설립한 회사일지라도 일제의 눈에 거슬리면 언제든지 회사를 정지, 폐쇄, 해산시킬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한말부터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실업률이 점차 높아졌으나, 「회사령」 체제하에서 한국인은 회사설립허가를 얻지 못해 민족산업은 심하게 탄압을 받았다. 1918년까지 일제는 일본인에게는 289개 회사설립을 허가해주면서 한국인에게는 일본인보다 훨씬 많은 설립신청을 하였는데도 63개 회사밖에 허가해주지 않았다. 또한 일제는 1915년 12월 24일에 「조선광업령」을 제정, 공포하여 「회사령」과 동일한 총독의 허가제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한국이 무연탄·흑연·동광·아연광·텅스텐광·몰리브덴광은 완전히 일본재벌이 독점하였으며, 금광과 은광도 대부분이 일본인이 소유했다. 1918년 일본인 소유의 광산액은 한국인 소유의 300배에 달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광산자원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실어갔다. 심지어 어업부문에서도 일본어민을 이주시켜 회사를 조직하게 하여 한국의 황금어장을 독점하였다. 일본의 어획고가 한때 세계 제2위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한국의 주요어장을 독점하여 약탈했기 때문이다.

4. 해방과 기독교의 역할

1) 평양대부흥운동이 해방에 미친 영향

한국 교회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평가 받고 있는 평양대부흥은 하루 아침에 발흥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의 정치, 사회, 종교 속에 개입하셔서 민족 각성을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해 오셨다. 1903년 하디의 원산부흥운동 이후 한국 교회는 크고 작은 영적 각성과 부흥을 경험하면서 더 큰 은혜, 더 큰 부흥을 사모하는 분위기가 교인들 사이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06년 8월 이후 전행된 평양선교사사경회, 서울선교사사경회, 목포부흥, 정오기도회 등은 평양대부흥운동의 발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906년 9월에 열린 서울선교사사경회 때에 존스턴이 방한해 웨일스와 인도의 부흥에 대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부흥을 사모하던 한국 교인들과 선교사들은 대단한 자극과 도전을 받게 되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 교회에서 너무도 소중한 초석이 되었다. 한국 교회가 비로소 교회로서 틀을 다질 수 있었던 사건이 바로 평양대부흥운동이다. 그것은 평양 지역뿐 아니라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돼 한국의 모든 교회들과 교인들이 영향을 받았고, 무엇보다 개인의 각성이 사회와 민족의 각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국 교회가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중심 기관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은 을사조약과 고종 퇴위라는 한일합방으로 대변되는 당시의 정치적 암흑기를 극복할 수 있게 했고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해준 중요한 종교적 사건이었다. 한국은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인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부흥 운동을 통해 놀랍게 성장했다. 1884년에 공식적으로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한 이래 약 20년 후인 1905년에 교세는 5만 명으로 급증했으며,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선교 25주년을 맞는 1909년에 교세는 20만 명으로 성장했다. 1907년 부흥 운동을 경험하면서 교회들은 전국 어디에서나 놀랍도록 부흥하기 시작했다. 1903년부터 이미 일기 시작한 부흥의 열기가 1907년에 접어들면서 절정에 달한 것이다. 해외 선교 열기가 시작되어, 제주도, 만주, 중국, 소련, 일본, 멕시코에 이르기까지 해외 선교 열기가 일어났다. 이런 영향으로 인해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칭하게 되었고, 조선은 ‘Choson’에서 ‘Chosen’(선택된 백성)으로 바뀌었다. 한국 교회가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구심점으로 거듭난 것이다.

1907년의 신학은 한국 교회 신학의 원형이 되었다. 3.1운동이 가능했던 것도 1907년의 공헌이다. 민주주의 개념이 교회를 통해 확산하게 되었던 것도 1907년의 신학 덕분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은 항일의 사상적 근원을 제시했으며, 한국의 독립에도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2) 105인 사건이 해방에 미친 영향

105인 사건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빌미로 꾸며진 일제의 자작극이다. 세계를 놀라게 한 이 사건은 1911년 10월 12일 평북 선천의 기독교계 학교인 신성중학교 학생 3명을 검거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이 지역의 기독교계 학교 학생과 교사가 연이어 구속된다. 특히 1912년 2월 국내외적으로 지명도가 있던 윤치호까지 구속된다. 이렇게 구속되어 기소된 사람은 123명에 이르렀다. 당시 사건 조작을 주도한 구니토모 경부는 구속자들이 1910년 12월 총독 암살을 계획했다며, 근거지로 평양의 대성학교 일신학교 숭실중학교와 선천의 신성중학교 등을 지목했다. 또한 암살 계획에 마펫 스왈렌 베어드 언더우드 매큔 로스 등 선교사 19명이 연루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 북장로회를 비롯한 북감리회 남감리회 YMCA국제위원회 등은 대책을 논의하고, 다양한 경로를 동원해 구속자들이 공정한 재판을 받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일제 재판부는 1912년 9월 28일 고문으로 강요된 자백 외에 아무 증거가 없음에도 기소된 123명 중 18명만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하고, 나머지 105명을 징역 5~10년의 중형을 선고한다.
이에 각 선교부 대표는 공동으로 사건 대응에 나서 일본 재판부와 조선총독부를 압박하고, 각 나라와 국제기구에서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도록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일제는 1913년 3월 열린 항소심에서 99명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안태국 임치정 옥관빈 6명에게 징역 6~5년을 선고했다. 이들 6명은 계속 상고했지만 기각됐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1915년 2월 천황의 특별사면 형식으로 석방된다.

체포된 신자들은 진실한 교인, 애국적 지사, 신지식인으로 인정받았다. 총독부는 무죄 판결로 상처를 입었으나 무단 통치를 강화했다. 석방된 한국인들은 이후 3・1운동을 주도하거나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게 된다. 105인 사건은 1905년 이후 계몽 독립 운동을 1919년 3・1운동으로 연결시키는 가교 역할을 했다.

3) 이승만이 카이로선언(Cairo Declaration)에 미친영향

대한민국 해방에 영향을 미친 카이로 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11월 27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미국 대통령, 처칠(Winston Churchill)영국 총리,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 총통이 전후 국제질서를 구상한 카이로선언을 공동 발표했다. 선언문에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는 적극적 언급이 없었고 오직 한국의 독립만을 약속했다. 여기에는 추방된 재한선교사를 비롯한 미국 기독교계의 적지 않은 역할이 있었다.

수백 명의 선교사와 가족들이 1940년 11월 16일 인천항을 떠났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한 이후인 1942년 6월까지 600여 명이 넘는 선교사들과 가족들이 한국을 떠나야 했다. 1942년 3월 6일,워싱턴의 백악관 근처에 있는,파운드리감리교회(Foundiy Methodist Church)의 담임목사 해리스(Frederick B. Harris)는 대통령 루즈벨트와 육군장관 스팀슨(Henry L. Stimson)에게 한국 독립을 간곡히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승만이 조직한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의 초대 이사장이기도 했던 그는 차기 미국 상원의원 원목(院牧)에 임명될 정도로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한국 독립에 적극적 지지를 보내고 있던 그는 특별히 추방된 재한 감리교 선교사 쇼우(William E. Shaw)로부터 한국 상황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듣고 루즈벨트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장제스에게 한국 독립 문제를 먼저 제기한 사람은 루스벨트 대통령이고, 카이로선언 초안 작성자도 루스벨트의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Harry L. Hopkins)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이나 홉킨스에게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전할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카이로선언 이전 적어도 세 차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승만은 1942년 한미협회와 기독교인친한회를 결성해 워싱턴에서 활발한 로비활동을 펼쳤다. 한국 독립을 요청하는 진정서에 서명한 이들은 사회적 지위와 기독교계에서의 영향력이 상당했다. 이들의 진정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루스벨트와 홉킨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5. 해방과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해방과 함께 풀어야 할 과제들이 갑자기 몰려들었다. 일본을 대체해야 할 지도력이 절실했다. 어떤 체제를 선택하고 실현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도 곧바로 등장했다. 이를 주도하려고 각 정파들이 급조되었다. 선점을 위한 경쟁과 대립,갈등이 치열했다. 그러나 한국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치체제는 결정되어 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을 맞이한 것이 아니어서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선언을 따라야 했다. 38도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했고 신탁통치를 받아야 했다. 한국의 동의와 상관없는 결정이었지만 이를 거부할 수 없었다. 이런 상항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은 두드러졌다. 이승만은 1907년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런 이승만의 경력이 독립운동과 해방 후 국가건설에 큰 힘이 되었다.

1) 정치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 시기부터 꾸준하게 반공사상을 주창해왔고, 이로 인해 미 군정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북한은 정부 명칭만 가지지 않았지, 해방 이후 소련의 주둔 아래 1946년 3월 민주개혁을 주창하며 중앙집권화를 강화했다. 1946년 11월에는 도, 시, 군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했다. 그 결과 1947년 2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런 위협 속에서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되자 한반도의 공산화를 우려하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여관철시켰다. 남한 단독 선거를 통해 이승만은 정치 분야에서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


2) 외교
이승만은 미국 유학 중에 학계, 정치, 종교계 등 다양한 그룹의 인사들과 교류를 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한 덕분에 국제정세에 대한 선견지명이 있었다. 국제사회에서 약소국의 대표로 어떤 외교를 펼쳐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대한민국 수립 이후 유엔과 미국 등 30여 개 국가로부터 승인을 획득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1952년에는 ‘인접 해양에 관한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일명 이승만 라인)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여 독도를 포함한 해역에서 어족자원 및 해저자원을 보호하였는데, 이는 1965년 일본과 어업협정이 맺어지기 전까지 한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의 역할을 해왔다. 6·25전쟁 막바지에 미국이 단독으로 휴전을 모색하자, 아이젠하워 대통령 등 미국의 정치가들을 회유 내지 협박하여 1953년 10월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손꼽히는 업적중 하나이며, 미국이 제공하는 군사적 보호우산 아래 나라가 발전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경제
1950년 3월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법 공포로 남한에서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는남한의 토지개혁을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남한지역까지 확대하려고 했던 북한의 의도를 완전히 무너뜨린 계기가 되었고, 한국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는데 기여하였으며, 6·25전쟁 시 남한의 농민들이 북한군에 부역하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6·25 전쟁 발발 전에 시작된 농지개혁을 통해 기존의 지주 토지 소유제를 청산하고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자작농적 토지 소유제를 확립하였다. 그 결과 전제 토지면적에 대한 자작지의 비율은 92.4%에 달하게 되었는데, 해방 당시 자작지의 면적이35%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비추어 볼 때, 한국 농업구조상 획기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4) 교육
이승만 대통령은 6년 의무교육제를 도입하고 성인들 대상으로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59년까지 전국 학령아동의 취학률을 95.3%로 높이고, 해방 당시80%에 달했던 문맹률을 22%(남11%, 여33%)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나아가 이승만정부는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대폭 증설하고, 해외 유학을 장려함으로써 산업화에 필요한 고급 인재를 양산했다. 해방 당시 우리나라의 대학과 전문학교는 19개교, 학생 수 8천 명에 불과했는데, 1960년대는 정부정책에 힘입어 초급대학·대학·대학교가68개교, 학생 수는 10만 명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이 대통령 집권기에 해외 유학생 수도 비약적으로 늘었는데,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정규 유학생’자격으로 해외로 나간 학생이 4,884명(미국 89.9%), ‘기술훈련 유학생’자격으로 출국한 학생이 2,309명이었다. 이밖에도 1950년대에 9,000명 이상의 군장교들이 미국의 각종 군사학교에 파견되어 교육을 받았다. 이런 교육정책의 장려로 인하여 1960년대 이후 ‘경이적’ 경제성장의 지적 기반이 조성되었다.

5) 여성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통해서 전통적인 양반제도를 뿌리 뽑았다. 그리고 남·녀 구분 없이 동등한 교육 및 취업기회를 정책적으로 보장했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의 평등화에 획기적으로 기여하였다. 이 대통령 집권기에 한국 여성은 초등학교 수준에서 남자와 똑같은 의무교육을 받게 되었고, 나아가 중·고등학교 및 대학에 대거 진학하기 시작하였다. 1958년 각급학교의 여학생 수를 비교해보면, 초등학교의 경우 3.1배(541,011→1,655,659), 중·고등학생의 경우 6.1배(63,516+23,721→88,625+6,469), 사범학교의 경우 2.5배(1,825→4,527), 그리고 대학(교)의 경우 8.5배(1,086→9,189)로 엄청난 증가를 보였다. 저학력 여성들은 타자수, 교환수, 섬유 노동자, 직조공, 피복공 등에 취업하였고, 고학력 여성들은 교원, 의사, 약제사, 경찰관, 공무원 등 직업을 가졌다. 1950년대에는 여성 판·검사, 여군 장교, 여자 항공대원, 여자 공학사가 나타났고, 국회의원과 장관 및 대사들도 등장하였다. 조선시대 이래 차별대우를 받던 한국 여성이 이 대통령의 집권기에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결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역사라는 활동 무대를 주셨다.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 그의 기뻐하는 종들을 택하셔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세상을 구원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신다. 하나님께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한성 감옥에 수감 중인 이승만을 만나주셨다. 교회만 다니던 이승만은 감옥에서 하나님을 만나 구원의 은총을 체험했다. 이승만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이 나라도 구원해 주세요, 나를 도구로 써주세요” 기도했다. 이승만의 개인구원과 국가 구원관이 감옥에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은 일제의 압제로 지구상의 가장 가난하고 어려웠던 나라에 선교사 군단을 보내주시고, 선교사들에 의해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한국교회가 이 나라 이 백성을 구원하고, 나라를 구원하는 등불이 되었다. 이제 21세기의 한국교회는 민족의 등불을 넘어 세상의 등불이 되어야 하는 사명 앞에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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