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이제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를 이제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요?
  • KMC뉴스
  • 승인 2011.03.15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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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장자연씨의 아픔을 함께 느낍니다

"죽음으로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장자연씨의 아픔을 함께 느낍니다"

그를 이제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피맺힌 한을.... 보듬어 줄 수 있을까요?

2년 전 소위 ‘장 자연’ 사건이 우리 사회를 강타했을 때, 풍문으로만 들리던 여성 연예인에 대한 성적 착취 구조가 윤곽을 드러내고, 마침내 그 고리가 약해지고 인권이 개선될 것이라 기대했던 우리가 얼마나 순진했던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수개월 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그가 그토록 다가가고 싶었던 미디어도 그의 절규에 화답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피라미 몇 사람 구속하는 것으로, 그야말로, 싱겁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피맺힌 절규에 그리스도가 화답이라도 한 듯 230쪽에 달하는 그의 친필 편지가 언론을 통해 공개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이들이 가담을 했고, 그들의 성적 착취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생생한 필체로 다시 살아나고야 말았습니다. 성상납이라는 말로는 여성억압의 본질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적 착취이며, 인신매매이며 곧 인권유린이었습니다. 참으로 괴로웠을 겁니다. 편지에서 드러나듯,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지옥’이었을 겁니다. 살아서 경험하는 지옥!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그의 몸에 친친 감겨왔을 절망과 고통! 살아서 지켜주지 못한 우리의 자매, 죽어서도 함께 하지 못해 그의 죽음이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그의 고통은, 우리 여성 모두의 고통입니다. 소위 민주주의 사회에 산다는 이 땅의 여성들은 지금 이 순간도 가정폭력과 성폭력, 성매매와 성적 착취로 고통 받고 심지어 죽어가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기독여성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의 아픔이 너무나 생생합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부장적 위계질서와 권위주의, 비민주성 등이 성적 억압과 착취를 낳고, 성적 억압과 착취가 여성들과 그에게 죽음을 낳았습니다.

예수님은 과부와 성매매여성의 친구였습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 성별과 나이와 인종, 직업에 관계없이 약하고 억눌린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과 어울려 마시고 먹으며 도래할 하느님의 나라를 얘기하셨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 기독여성들은 ‘장 자연’ 사건과 끝까지 함께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기독여성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더 이상, 그의 죽음이 묻혀서는 안 됩니다. 어떤 경우라도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적 착취와 인권유린을 좌시해서는 안 됩니다. 위조 운운 하며 또 다시 묻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는 그를 당당하게 장 자연 씨라고 부르렵니다. 그의 이름이 더 이상 여성 억압의 상징이 되지 않도록 그를 지키렵니다. 그에게 함께 가겠다, 라고 말을 건네렵니다. 그리고 삼가 그의 명복을 빕니다. 또한 우리는 아래와 같이 실천해 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우리의 실천

1. 죽음으로 항거한 장자연씨의 억울한 영혼의 외침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지켜본다.

2. 이에 대한 우리의 의견과 입장을 온라인과 여성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적극적으로 알린다.

3. 성적유린과 인권을 짓밟는 사회현실을 개선하기위해 여성들 스스로 힘을 모아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2011. 3. 14

예수.여성.민중과 함께 하는 기독여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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