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조선감리교회, 그들이 이해했던 ‘진정한 감리교회’는 어떤 교회였을까?(2)
1930년 조선감리교회, 그들이 이해했던 ‘진정한 감리교회’는 어떤 교회였을까?(2)
  • 곽일석
  • 승인 2022.10.03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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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와 신생과 성화와 완전’의 온전한 구원을 추구하는 산 교회여야 했다.

조선감리교회, 그것은 역시 감리교회였다. 그런데 문제는, 감리교회의 본질은 무엇이고 이제 새롭게 출발하는 마당에서 어떻게, 어떠한 참된 감리교회를 세우느냐는 것이었다. 초기부터 선교사들의 의식적인 노력과 몇몇 해외 유학신학도들에 의해 웨슬리와 감리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소개받고 이해하고 있던 조선감리교인들이였다. 아직 감리교회의 전체 모습에 대해 넓고 깊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 본질과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조선감리교회였다. 또한 새 교회의 “역사적 선언”은 전체 감리교회역사와의 연속성을 나타내려는 의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추구한 조선감리교회의 감리교적 특성은 개인의 영적인 구원과 사회구원을 조화시키려 한 노력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웨슬리와 감리교도들의 운동은, 사실, “성서적 구원의 길”을 추구하고 완성하려는 구원운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로마가톨릭교회나 영국성공회의 의식 ‧ 제도 ‧ 형식주의나 이신론(Deism)의 메마른 합리주의, 칼빈주의 이중예정론의 율법페기경향이나 루터교회의 무율법주의나 경건주의의 정숙주의 한계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자유은총과 인간의 책임적인 응답”의 구원구조 위에서 의인화와 성화의 온전한 구원을 추구했던 살아있는 복음적 신앙운동이 감리교회를 역사 속에 출현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성서적이고 복음적인 신앙의 길 위에서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살아있는” 기쁜 경험을 함께 나누며 전했던 감리교회는 ‘세계를 나의 교구’로 삼는 선교적 교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감리교회 신앙운동의 맥락에서 새로 출현한 조선교회도 역시 ‘참회와 신생과 성화와 완전’의 온전한 구원을 추구하는 산 교회여야 했다. 양주삼은 이런 감리교회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었다.

감리교회는 ‘진실한 기독교’와 ‘선교적 구조의 교회’와 ‘영적인 부흥의 교회’로 정의 되어 왔다. ‘세계가 나의 교구’라는 구호는 그리스도의 참된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감리교회는 전파되는 곳마다 열정적이고 활동적인 많은 신앙인들을 만들어왔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과 함께 증거 하는 종교경험에 바탕을 두고 죄인들을 회개와 온전하고 자유로운 구원으로 부르는 감리교회의 복음적 부흥운동은 세상의 여러 지역에서처럼 조선에서도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 죄와 가난으로 고통 받고 있는 오늘날 조선의 최고 요구는 회개와 신생이다. 따라서 감리교회의 부흥은 현재 조선인의 종교적 요구에 응답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조선감리교회에 열정적인 부흥과 선교적 정열이 지속되기를 원한다.

조선감리교회, 그것은 실로 성령의 새로운 숨결 안에서 온전하고 충만한 구원의 내적 경험과 외적인 증거를 함께 나누는 자유와 기쁨과 능력의 산 교회를 추구하였다. 더 나아가, 감리교회는 개인의 구원과 성화의 울타리 안에 있는 편협한 교회가 아니다. “사랑으로 완성되는 신앙”과 “사회적으로 표현되는 구원의 외적 증거”에 바탕을 두고 사람이 그 안에 살고 있는 창조의 전 영역에 걸쳐 사회적 성화를 이루기 위해 사회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감리교회이다. 조선감리교회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일터로 부여받은 조선사회의 개혁과 구원을 위해 새로운 출발을 시작한 것이었다.

감리교회는 단지 부흥운동이나 선교만을 하는 교회가 아니다. 그것은 애 초부터 공동체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이다. 오늘날 조선의 도시나 농촌 사회의 요구는 매우 크며, 여기서 교회는 부름을 받고 있다. 지금은 감리교회의 본성을 나타낼 수 있는 아주 좋은 때이다. 참된 교회는 섬기는 교회일 것이며, 조선에서 감리교회는 부흥적이고 선교적이며 봉사하 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들이 새롭게 창립되는 조선감리교회를 통해 추구하려 했던 참된 감리교회, 그것은 분명히 일제의 억압과 가난 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 조선사회의 요청에 헌신적으로 응답하는 사회적 성화의 교회였다. 또한, 참된 감리교회는 그리스도의 은총과 구원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넉넉한 교회이다. 조선감리교회는 편협한 고집이나 왜곡된 선입견으로 오염된 교파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리스도의 보편적이고 넉넉한 사랑과 대도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다정다감한 형제애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개방적인 교회를 추구하였다. 실로, 웨슬리의 보편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조선교회였다.

대외적으로, 조선감리교회는 미국감리교회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분리독립된 교회가 아니라 자치하는(autonomous) 교회였다. 당시 피셔(J. E. Fisher)선교사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독립보다는 자치를 주장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인력과 경제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계속 미국교회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는 자치교회를 택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선교보조비의 운영과 선교사 수급 등을 담당하는 중앙협의회(Central Council)를 설치하였고, 그 영향력 또한 적지 않았다. 이 점은 또한 조선감리교회의 독립성 결여로 비판받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당시의 조선감리교인들이 완전 독립보다는 미국교회와 조직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자치교회를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중요한 이유가 숨어있었다. 1930년, 그러니까 만주사변을 코앞에 두고 조선의 완전고립과 착취를 더해가던 일제의 지배아래서 홀로 독립된 교회가 생길 때, 박수를 치는 쪽은 일제였기 때문이다. 창립준비를 위한 전권위원회의 모임에도 일제의 경찰이 감시원으로 따라다니고 있던 상황이었다. 미국감리교회 전권위원 중 한사람이었던 하웰양의 보고는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 대표자가 이렇게 말했다: ‘조선인들은 아주 빠르게 고립되고 있다. 우리들은 세계의 중요 회의나 국가들의 회의에 대표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모든 국제적인 모임이 조선인을 거부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교회가 제공하는 국제적인 접촉마저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완전히 고립될 것이다’.

즉, 조선 민족의 독립이나 미래를 위해서도 현 상황에서는 독립교회보다는 자치하는 교회를 선택하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감리교회와 관련하여 집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모교회”(Mother church)개념이다. 당시 선교사나 조선인이나 모두 미국교회를 어머니교회요, 조선교회를 자식교회(?)로 인식하고 있었다. ‘모교회’는 당시 선교국교회와 피선교국교회 사이의 관계와 위치를 나타내는 데 쓰고 있던 개념인데, 두 교회 사이의 주고받는 현실적인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의식적인 차원에서 꼭 극복했어야 할 한계였다. 신학적으로, 세상에서 그 어떤 교회도 또 다른 교회를 낳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섭리의 손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요, 인간들은 오직 그 심부름꾼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아무리 정신적이고 물질적으로 정성을 기울였다고 하더라도 일단 새 교회가 출현하면,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서 형제나 자매교회의 평등한 관계로 서게 된다. 따라서 어딘지 불평등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모교회 보다는 당시 저 옆에서 가끔씩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던 “상호”공경과 사랑의 형제교회 개념을 의식적으로 사용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상기의 내용 중 상당부분은 2030 메소디스트 포럼의 지도위원인 성백걸 박사(백석대 교수)의 논문에서 발췌 인용한 것으로 허락을 받아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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