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성도의 재물에 대해 말씀 드렸는데, 현실 생활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떠날 수는 없지만 겸하여 섬길 수도 없다고 했다. 육신의 눈을 가진 우리의 관찰과 이해와 접촉은 모든 곳에 임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한 곳을 향하여 방향과 목적이 설정되어 행동하도록 되어 있다. 눈은 두 개이지만 시각은 초점을 맞추어 하나로 집중되어야 한다. 그것이 안 될 때 혼란이 온다. 사람의 신체는 어느 기관이든지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게 된다면 눈이라고 대답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도 눈의 귀중성에 대하여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표현하시며, 눈이 성해야 온 몸이 밝아서 무엇이든지 볼 수 있지만 만약에 눈이 성하지 못함 때 온몸을 어둡게 하는 것이 눈이라고 말씀하셨다.
첫째: 온몸을 밝게 하는 눈(22절)
1) 눈은 몸의 등불
눈은 사람이 무엇을 볼 때 사용하는 등불 구실을 하는 신체의 한 부분이다. 눈은 신체의 한 부분일 뿐이지만 육체의 눈이 밝고 어두움에 따라 온 몸이 영향을 받는다. 눈이 좋고 나쁘고에 따라서도 편리하고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많으나 장님의 경우를 볼 때 눈에 큰 이상이 없는 것도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의도하신 눈의 경우는 분명히 육신의 눈에 국한된 것은 아니라 마음의 눈까지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그 영향은 절 대적으로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눈의 중요성에 대해 어느 지체보다 더 강한 의미를 부여 하셨다. 눈은 몸의 등불, 즉 눈은 우리를 빛으로 안내하는 등불의 역할을 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몸의 등불'을 흠정역(KJV) 는 'the light of the body'라고 했는데 눈이 'light'는 아니다. 육신의 눈이 몸에 대한 빛 자체나 빛의 근원이 아니고 다만 빛으로 인한 안내자의 역할인 '등불'(lamp)이기 때문이다. 개역성경에서 '몸의 등불'(the lamp of the body)라고 번역한 것은 좋은 번역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눈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영원히 쇠하지 아니하는 것에 집착할 수도 있고 반대로 일시적인 땅의 것 즉 물질의 노예가 되는 삶에 집착할 수도 있다.
2) 온전해야 할 눈
왜 눈이 온전해야 하느냐? 눈이 온전하지 못할 때 바라보아야 할 것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눈은 상대방을 보게 되어 있다. 두 눈을 가지고 보는 시각이나 관찰력은 엄청나다. 눈동자의 역할은 대단한 일을 해 낸다. 그런데 중요한 원리가 있다. 눈은 두 개이지만 시각은 하나이다. 관찰과 이해는 두 곳에 미쳐야 하나 초점은 한곳에 맞춰져야 한다. 만약에 한곳에 집중이 안 되면 온전한 눈이 못 된다. 두 눈이 제각기 보아도 안 되고, 두 개가 보여도 안 되고 얼 보여도 안 되고 명확히 하나로 초점이 맞춰져야 온전한 눈의 구실을 한다. 온전한 눈이라고 할 때 사물을 관찰하는 명확성에만 있는 것 아니고 보다 영적인 의미도 있다. 온전한 눈을 가진 자는 타인보다 자기를 보게 되어 있고, 물질에 집착하는 현재보다 미래를 바라보며 영원을 사모하게 된다. 코앞만 보는 근시안적인 삶이 아니라 원대한 꿈을 가진 미래지향적인 삶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보는 영안이 열리게 되는데 하나님을 보는 눈이 되려면 마 5:8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 임이요"라고 했는데 예수를 믿고 회개하여야 하며, 요 3:3에서 거듭난 자는 하나님을 본다고 했는데 믿음에 의해 새 사람이 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된다. 눈이 아무리 굉장한 기능을 가졌어도 동떨어진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햇살이 태양과 분리되면 빛을 비출 수 없고 전등이 전력과 분리되면 빛을 발할 수 없듯이 사람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결코 빛을 비췰 수 없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했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떠나서는 결코 빛을 비췰 수 없게 된다.
둘째: 몸을 어둡게 하는 눈(23절)
1) 어두움을 좇는 악한 눈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둡게 된다고 했는데 나쁘면(ponhro", evil)은 '악한, 불경한, 우상 숭배적'이란 뜻이다. 사람이 누구나 이 같은 눈을 가지면 사고방식이나 가치관뿐 아니라 사는 방법도 엄청나게 달라지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현상대로만 따라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현재 눈을 가지고 어떤 마음가짐과 생각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 성공적 삶이냐, 아니면 엄청난 실패를 가져다 주느냐가 판가름되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류 최초의 사람이 범죄하게 된 이후로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되었는가를 확실히 알게 된다. 사탄의 유혹을 받은 이브가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라고 했다(창 3:6).
죄의 통로가 마음과 연결이 된 상태에서 눈의 작용은 엄청나게 달라진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마 18:9에서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신 것이다. 현대는 두 눈이 멀쩡한 영적 불구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의 눈은 제대로 볼 것을 보는지? 어두움을 쫓는 악한 눈이 되어있지 않은지?
2) 바로 보지 못하는 눈
눈이 어두운 자는 태양빛도 바라볼 수 없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좋게 보지를 못한다. 어두움을 쫓는 눈을 가진 자는 결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세상엔 재물 때문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이 많다. 그의 눈엔 돈만 보지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어두운데서 계속 생활하는 박쥐나 부엉이는 빛보다 어두움을 좋아하고 어두움에 익숙한 동물도 오히려 빛을 싫어하고 빛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두움의 마음을 가지고 어두움의 생활을 즐기던 사람은 낮보다 밤을 좋아하고 빛의 생활에 적응도 되지 않으므로 어두움의 생활을 반복하게 되어 있다. 이런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겔 12:2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