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에 무너지는 사람들
수치심에 무너지는 사람들
  • 민돈원
  • 승인 2018.07.31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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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 자결(自決)이란 ‘의분을 참지 못하거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충성된 신하의 경우 패한 장수는 적에게 항복하기 보다는 자결을 택하는 것이 무사의 도리라고 배워왔다.
그런데 이런 역사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조선말 병조판서(국방부 장관)를 지낸 민영환(1861-1905)은 '嗚呼國恥民辱乃至於此 (오호국취민욕내지어차: 오 슬프다!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하면서 1905년 을사늑약의 의분을 참지 못하여 자결하고 말았다, 뒤이어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등의 자결이 뒤를 잇게 되자 그 결과 전국으로 의병운동이 확산되었다.

한 때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민운동이 거세게 일던 80년대 대학가, 노동계에 젊은 청년들의 연쇄적인 분신자살이 이어졌던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한때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 또한 줄을 이은 적이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기업인과 고급 관료 출신의 정치인의 자살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2003~2004년 사이에 전 현대그룹회장 정몽헌(56세, 2003년), 전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69세, 2004년), 전 전남지사 박태영(64, 2004년,), 전 부산시장 안상영(67세, 2004년), 그 이후로도 노무현 전 대통령(63세, 2009년), 전 경남기업 회장 성완종(64세, 2015년), 그리고 얼마 전 목숨을 끊은 정의당의 노회찬 전 국회의원(62세, 2018년) 이름만 들어도 세간에 알려진 굵직한 인물들이 하나같이 같은 길을 택했다.
이를 잘 반영해주는 통계가 있다. 한국자살예방협회가 통계청의 데이터를 받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유명인들이 자살할 경우 그 여파로 이를 모방하는 자살 형태가 나타난다고 하는 일명 ‘베르테르 효과’가 있다고 분석 한다. 실제로 유명인이 자살한 뒤 한두 달 새 평균 600명가량이 뒤따라 목숨을 끊은 충격적인 연구 결과도 보고되고 있다.
알다시피 위에서 언급한 이들은 나름 그 방면에 인생에 최고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다. 그러기까지 역경을 견뎌왔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치명적인 약점, 그것은 적잖은 돈에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들 내면의 양심을 휘젓는 수치심앞에서는 더군다나 한없이 약하기만 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무너지자 더 이상 그들은 목숨을 지탱할 수 없게 되고 극단적인 길을 택하고 말았다.

반면에 이전에 조선시대 고위관리들은 일제로부터 침략을 당하게 되는 경우 나라와 백성들이 당할 수모를 차마 볼 수 없는 의분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결을 택했다. 이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들의 죽음을 평가절하 할 수 없고 공방에 여지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종교적으로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도 없을 뿐 더러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고 본다.
그런데 최근 노회찬 전 의원에 대한 자살을 두고 네티즌들은 물론이고 일부 정치권에서도 그에 대한 설왕설래 공방하는 경향을 보게 된다. 얼마든지 자신의 의사를 피력할 수는 있는 자유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기독교에서도 그의 자살을 두고 공방을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늘 그래 왔듯이 ‘성경적인가?’라고 하는 일률적인 잣대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표적인 몇 몇 인물들이 부정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했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스스로 목매어 목숨을 끊은 아히도벨(삼하17:23) 이와 비슷하게 주님의 제자였다 배반한 후 정죄의식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을 매어 목숨을 끊게 된 가롯 유다(마27:5) 그리고 그의 반대파 지휘관 오므리를 따르는 무리들이 그를 왕으로 옹립하면서 성읍이 함락되자 자신의 체면과 이런 반역이후 벌어진 견딜수 없는 자괴감으로 인해 왕궁에 불을 놓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시므리의 7일 천하 사건은 불행한 죽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성경의 세 인물들 모두는 조선 말기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는 민족의 자존심이 짓밟혀 사느니 차라리 자기의 목숨과 바꾸는 자결과는 사뭇 달랐다. 이는 나라만이 아니라 마치 한 가정의 옛 여인들이 자신의 순결이 짓밟힐 때 몸에 지니고 있던 은장도를 꺼내어 자결을 했던 것에 비유하곤 한다.

고 노회찬 전 의원의 경우 불법정치자금 4,000만원을 받은 것을 시인한 것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압박에 오는 수사로 인한 수치심은 정의를 외쳐온 그로서는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는 것과 같았으리라고 생각된다. 그의 삶의 한계와 지탱해 준 정의는 여기까지였다. 이 부분에 대해 그나마 비난하지 않는 입장을 가진 일부 기독교계에서는 그가 속죄의 자리까지 나아갔어야 했다고 그가 스스로 생명을 끊은 행위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 정치인은 불법자금 받은 것과 그것에 대해 거짓말 했던 사실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들었기에 자살이라는 고통스런 마지막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대와 상황을 무시한 채 자살을 비난만 하기에 앞서 적어도 속죄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가 유서에 남긴 말 중에 책임감과 수치심을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깊이 곱씹어보아야 할 대목이다. 왜냐하면 복음이 말하는 속죄의 은총은 분명 우리의 사회적 책임, 양심을 그 이전보다 무디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속죄를 받았다는 그럴싸한 이유로 양심과 수치스런 마음이 희박해져서야 되겠는가?

역경도 이겨야 하겠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 수치심을 당할 때 뻔뻔해서도 안 되고 더욱이 무너져서도 안 된다. 비록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지만 진솔하게 내 인생을 통치하시는 주님앞에 가지고 나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살에 대한 미화나 비난 등으로 인한 맞불공방은 여전히 오늘 우리 사회가 처한 미성숙한 시대적 아픔이요 다양한 해석의 차이이다.
따라서 목회 현장에서 만나는 성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교회는 이런 사회적 아픔에 공감하고 여러 해석을 천편일률적으로 몰이해하기보다 어떻게 복음적으로 융합함으로써 생명경시 풍조를 극복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이 아닌 대의명분을 가지고 살되 수치심과 모멸감을 받을 때 무너질 수밖에 없는 자신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앞에 애통하며 불의에서 돌아서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물음으로써 교회와 사회를 통합할 줄 아는 성숙한 자아의식이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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