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주기도문(6) 용서하는 생활 (마 6:12)
28. 주기도문(6) 용서하는 생활 (마 6:12)
  • 주성호
  • 승인 2018.07.09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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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주기도문 전체로 볼 때 다섯 번째 기도문이고, 주기도문의 후반부인 사람을 위한 기도문으로 볼 때는 일용할 양식 다음의 두 번째 기도문으로서 자신의 죄는 물론 다른 사람의 죄까지도 용서하는 기도문이다.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며 기본적인 것은 일용할 양식이다. 당장 끼니가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신의 양식보다 성도는 신령한 양식을 중시해야 한다고 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여주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용서 없이는 영적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므로 용서를 위한 기도가 강조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를 통해 구체화되었는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심에서 나타났다. 또한 예수님 자신의 생애 전체가 용서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수직적인 하나님으로부터의 용서는 곧 수평적인 인간끼리의 용서와 병행을 이루는 것임을 일깨워 주셨다. 사랑은 곧 용서이며, 여기에 신앙의 아름다움이 있다.

첫째: 용서의 당위성

1) 용서하시는 하나님(시 78:38)
하나님의 속성을 논하거나 하나님의 본성을 쉽게 말할 때 한마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한다. 시 78:38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을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 인간들이 마음먹은 것이나 하는 꼴들을 보시고 그대로 분을 내시고 진노를 내리신다면 지금까지 세상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 86:5 "주는 선하사 사유하시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여기에 성도에게 있어서 용서의 당위성이 나온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기를 좋아하시는데 그를 믿는 성도인 우리가 용서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야 한다. 특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 대해서는 연약함을 아시며 불쌍히 여기시며 용서하시기를 원하신다(시103:12~14). 그러나 무조건 용서는 아니다. 회개하지 않거나 악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결코 용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신 줄 알아야 한다. 벧후 2:4~6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경건치 않은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용서하기를 본성으로 가지고 있어도 악은 결코 용서의 대상이 아님은 분명하다.

2)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눅 23:34)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인가? "죄인을 구속하기 위하여"라고 누구나 답변하게 된다. 죄의 구속은, 죄의 용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이 용서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용서의 삶을 친히 사신 분이시다. 한 번엔 제자들이 예수에게 질문을 했다. "용서하라, 용서 하라 하시는데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됩니까? 일곱 번은 어떻습니까?" 아마도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일곱 번 정도면 대단한 용서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주님의 답변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이는 무한한 용서를 뜻한다.
예수님의 용서의 극치는 십자가 위에서 나타났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는 원수들까지도 용서하며 그들을 위해 오히려 기도를 했다. 주님의 용서는 십자가의 사건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로서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 그 결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진정한 화목이 이루어졌다.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로 인한 구속의 은총에 감격해야 되고 감사해야 한다.

둘째: 용서의 자세

1)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라(눅 17:3)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완전한 용서가 이루어짐으로 누구나 완전한 용서를 받게 되어있다. 그러나 여기에 필수적으로 따라야 할 것이 있으니, 그 전제와 조건은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자만 구원을 받아 영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관련하여 인간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제한성도 지닌다고 하는 사실이다. 사랑이라고 해서 무조건이 아니고 용서도 무조건이 아니다. 제한성도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눅 17:3~4에서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면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 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거듭 강조되는 것은 회개하였을 때만 용서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는 용서도 하나님 앞에 겸허한 마음으로 회개하여야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함을 알아야 한다.

2) 피차 용서하라(골 3:13)
골 3:12~14에서 바울은 성도의 생활원리 중 용서에 대해 말했다. "너희는 하나님의 구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실제로는 너무 어려운 권면인데 성도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서로'라는 말을 '피차'라는 말과, 그리고 '용납'이라는 말을 '용서'라는 말과 앞뒤로 교차하여 용서해야 할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라는 어구를 공동번역에서는 "서로 도와주고 피차에(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의역하여 옮기고 있다. 결국 용서와 도와준다는 말은 같은 뜻의 다른 말임을 알 수 있다. 사랑이 그렇듯 용서도 피차 주고받는 입장이 되어야 하는데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용서하는 입장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내가 먼저 해야 함을 가르쳐 주셨다. 사랑의 하나님의 크고도 완전한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전제로 다른 사람의 과실을 먼저 용서해야 한다. 마 6:14~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천부께서도 너희의 과실을 용서하시리라.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뿐만 아니라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도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을 연계시켜 말씀하심으로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임을 가르쳐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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