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주기도문(5) 성도의 양식 (마 6:11)
27. 주기도문(5) 성도의 양식 (마 6:11)
  • 주성호
  • 승인 2018.07.02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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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주기도문의 설교는 주기도문의 전반부로 하나님을 향한 기도였다. 요약하면 세 가지
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②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도 이루어지기룰 바라며,
③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였다.
오늘부터는 주기도문의 후반부로 인간의 필요를 위한 기도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영, 육간에 필요한 것들이 많으므로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라 할 수 있는 매일 매일을 위한 일용할 양식에 대한 내용의 기도이다. 이로서 주기도문의 정신에서 볼 수 있는 2대 주류는
① 하나님께서는 만유의 주로 온 우주적인 구원을 이루시는 구원주일뿐 아니라
② 그를 믿는 성도들 즉 개인의 필요한 것과 일상생활까지도 보살피시고 그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첫째: 육체의 양식

1) 일용할 양식(마 6:11)
일용할(epiousio")이란 단어는 주기도문에만 사용된 특별 용어인고로 정확한 의미를 쉽게 말하기가 어려운 단어인데, 보통 '날마다, 내일의, 필요한' 등으로 해석되고 있다. 양식(arton)은 크게 두 가지로 사용되고 있는데, 하나는 당시 유대인의 주식이었던 빵을 가리킨다. 다행히 오늘 우리는 끼니 걱정은 안하고 있지만 이 세상의 인구 중 반은 매일을 위한 끼니 걱정을 하고 살며, 특히 최근에 이북 동포들은 하루 두 끼 먹는다는 뉴스가 나왔다. 또한 양식이란 인간생활에 있어서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에 필요한 일체의 식물을 가리킨다. 빵만 먹고 살 수는 없고. 보통 하루에 30가지 이상의 음식물을 골고루 먹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한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이란(Our daily bread) 인간이 육신생활을 유지해 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며 매일의 양식을 먹은 것으로 감사하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일용할 양식을 위한 양식을 인간생활에 최우선에 놓고 기도하라는 것은, 육의 생활이 영의 생활보다 중요해서가 아니라, 일용할 양식이란 우선 육신 생활을 해나가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을 표현한 용어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매일의 양식을 위한 좋은 기도제목은 잠 30:8의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는 것이 될 것이다.

2)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요 6:27)
양식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자동차는 기름이 있어야 움직이고 기계는 동력이 있어야 작동을 하듯 인간은 매일 양식을 먹어야 활동한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주신 것 중 은혜의 선물은 일하지 않아도 먹을 것은 걱정 없이 살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창 3:17~19에 보면 불순종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는데 일용할 양식에 치명타를 받은 셈이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러므로 노동은 죄의 대가가 되었지만 인간은 노동하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도록 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인간은 일해야 되고 일하는 것이 의무요. 신성시 되었다. 다른 측면으로 볼 때 그것 역시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바울도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다(살후 3:10). 일 안해도 살 수 있다면 게을러지고 가난하게 살 것이다. 그런데 어느 시대나 일하기 싫어하는 자들이 많다. 바울 당시에도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으니 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럴듯하지만 내일 주님 재림하신다 해도 오늘까지 충실히 일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격언 중에는 내일 말세가 온다 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말도 있다. 한편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름뱅이들이 있다. 잠언에 보면 게으른 사람들은 물 대접도 들어올리기 싫어서 마시기를 싫어한다고 했다. 이런 자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가난한 나라 사람들보면 대부분 일하기 싫어한 사람들임을 볼 수 있다.

요즈음 강도들이 많이 등장한 것 중 특이한 것은 일하기는 싫고 돈이 필요하니 강도짓을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죽자하고 일만 하는 사람들도 많다. 쉬는 날도 없고 주일도 없다. 일하는 것은 좋은데 무엇을 위하여 일하느냐가 문제다. 일하는 것이 과욕을 부리는 기계가 되었으니 문제다. 예수님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29)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일하는 목적이 설정되어야 한다. 돈을 버는 것은 벌어서 쌓아놓기 위함이 아니고 좋은 일에 잘 쓰기 위함이어야 한다. 한마디로 육을 위해서만이 아니라(재물에 소망, 욕심 두지 말아야 함) 영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육신보다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목적을 설정하고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한다.

둘째: 영혼의 양식

1) 말씀(마 4:4; 요 6:51)
육체를 가진 인간은 육신의 양식이 없이는 결코 살 수가 없다. 그러나 육체의 양식만으로 살 수 없으니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영혼의 양식도 필요하다. 그러면 영혼의 양식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40일간을 금식기도 하셨는데 그때 마귀로부터 세 가지 시험을 당하셨다. 첫째 시험인 돌로 떡을 만들라 했을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셨느니라"(마 4:4)고 대답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음식과 운동으로 최선의 방법으로 쓰고 있지만,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거의 무관심한데 영혼의 건강을 살찌우는 데는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 보편적으로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을 말하지만 성도들은 영, 육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영, 육이 건강해야 인간다운 건전한 삶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2) 신령한 식물(고전 10:3~4)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어떻게 그들의 생명을 지탱할 수 있었는가? 출 16: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다." 이것이 만나인데, 이 땅에서 일용할 양식은 자연산으로, 또는 인공적으로 재배하여 얻어지는 것으로 음식을 섭취하지만,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주신 것이므로 신령한 양식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것을 욕심을 부려서 많이 거두면 다음 날은 썩고 만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요 6:32~35에서 자신이 곧 신령한 양식임을 증거하셨다.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했다 예수께서는 인간들이 먹어야 할 신령한 양식을 먹어 영원히 주리거나 목마름이 없이 살기를 원했다. 광야에서 먹은 만나로는 죽었으나, 요 6:48~51을 보면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해 이 세상에 오시므로 생명의 길을 여셨고, 십자가에 죽으사 죄를 사하시므로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

바울도 고전 10:3~4에서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며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식물은 그리스도의 몸과, 음료는 그리스도의 피와 비교되었다. 양식과 음료가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필수적인 요소인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죄인인 인간이 구원을 받아 영혼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십자가의 구속을 믿는 일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 성도는 육과 영 모두 강건의 축복으로 평강의 삶을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감격으로 매일 매일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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