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하청(百年河淸)의 틀 깨기
백년하청(百年河淸)의 틀 깨기
  • 민돈원
  • 승인 2018.06.12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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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대 문명 발상지 중에 하나인 황하(黃河) 문명이 있다. 중국은 이 황하강을 중심한 문명 발상지역이다. 그런 황하강이 황토 고원을 통과하다보니 토사가 유입되어 황하강의 상태가 맑을 날이 없는 강으로 알리어져 있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백년하청이다. 즉 어떤 일이 오랜 시간이 흐른다 해도 이루어지기가 불가능함을 의미하는 뜻이다.

이런 백년하청의 틀을 교회구조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 듯 스쳐왔다. 예컨대 우리의 가치변화와 좋은 성품이 전제 되지 않는 자기 주관 일변도의 신앙 활동을 주장하는 자들의 교회 체제로서는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좋은 믿음이라고 말하려면 단언컨대 우선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된 성경적 가치관을 필요로 한다. 동시에 여기에 이전의 조야한 성품에서 계속된 변신을 거듭하여 좋은 성품의 과정을 거친 자들이라야 붙여줄 수 있는 말이다.

우리 주위에는 예수님 없는 인격자가 있을 수 있다. 또한 불편한 사실은 인격이 부실하면서 예수님을 표방하는 신앙인도 공존한다. 전자는 복음을 통해 성경적 가치관만 붙든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리라.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좀 더 복잡하다. 이들은 종종 자기방어와 도그마에 빠져 좀처럼 자기 수정을 하려는 일을 꺼려한다. 즉 오랫동안 익숙하고 경직된 주관적인 내면화로 자기를 방어하며 살아간다. 그런 그들에게서 새로운 변화는 기대하기 요원하다. 따라서 좋은 신앙인이 되어 주님 말씀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려면 반드시 성품의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흔히들 믿음이 좋다는 사람을 들여다보면 적지 않게 내면의 성품을 고려하지 않고 교회 안에 검증되지 않은 채 섣부른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거의 주관적인 활동을 중시한 편향적인 시각에서 믿음의 점수를 매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도 이제는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의 훈련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신앙의 훈련은 인간관계 훈련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좋은 인간관계를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 탁월한 인내로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 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아는 수용성 높은 자세, 감정기복을 타지 않고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매너, 항상 감사하되 말과 물질이 생활화된 자, 누구든 만나면 칭찬하되 즉각적으로, 구체적으로, 그리고 반복해서 상대방 장점을 캘 줄 아는 자, 그리고 남과 대화 시 존경하는 자세로 청종할 줄 아는 미덕을 가진 이런 인간관계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여기에 영성 있는 자 정도 되어야 좋은 믿음,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이후로는 불러야 하리라.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라는 우리 내부의 자조 섞인 백년하청(百年河淸)의 실망스런 소리들이 어언 듯 사라지고 비로소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다.’라는 원래의 그 목소리가 세상으로부터 싱그럽게 솔솔 들려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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