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주기도문(2)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 (마 6:9하)
24. 주기도문(2)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 (마 6:9하)
  • 주성호
  • 승인 2018.06.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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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나 만물이나 나름대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사람마다 구별하고 사물마다 구분하기 위해서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에 의해 구별될 이유가 없으며 인간의 한정된 지식으로 그의 모든 것을 인식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계시에 의해서 뿐인데,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뿐 아니라 하시는 일로 스스로를 계시하시므로 계시된 극히 부분만을 인간이 알도록 되어있다. 하나님의 이름은 최초에 어떻게 붙여지게 되었는가? 출애굽기 3장에는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목자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온다. 모세가 13절에서 애굽의 하나님 백성들이 누가 보내서 왔느냐 하면 무엇이라 대답해야 되느냐고 질문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또한 출 6:2에서는 "나는 여호와로다" 라고 친히 그 이름을 알려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들이 노력하고 연구하여낸 이름이 아니라 스스로 알려주신 이름으로서 신비한 이름이요 거룩한 이름이므로 사람들에게서 거룩하게 여김을 받아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이름

1) 여호와 : 스스로 계시는 자(출 3:13~14)
모세가 장인 이드로의 양무리를 이끌고 호렘산에 이르렀을 때.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데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섰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인데 애굽에서 고통 받고 있는 네 백성을 이끌어내라고 말씀하신다. 11절에서 모세는 "내가 누구관대?"라고 하며 어림도 없다고 하자, 내가 너와 함께 할 테니 이유 없이 가라고 하셨다(12절). 누가 보냈느냐고 하면,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면 어떻게 대답하느냐고 묻자(13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 (I AM THAT I AM)라고 하시며,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하셨다(14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사람들이 지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나타내신 이름이며, 그 이름 속에 그분의 속성과 의지가 내포된 거룩한 이름이다.

2) 엘로힘 : 삼위일체의 하나님(창 1:26)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어떻게 하셨는가?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로 하여금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셨다고 했다. 여기서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보게 된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셨다. 이름을 짓게 하신 것도 그러한 다스림의 하나이다. 31절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조과정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한 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요 1:1~2에서 시인하셨고 증거도 하셨다. 요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개념 가운데 삼위일체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간단히 설명한다면 성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친히 창조하셨고, 성자 하나님은 성육신 하셔서 구속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셨고,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이루어 가도록 역사하고 계신다.

3) 아도나이:주 하나님(창 15:8)
창 15:8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주 여호와여"라고 부른다. 아도나이란 말은 주 또는 주인이라는 뜻인데, 아브라함은 많은 하인을 거느리고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종 관계로 보았고, 종의 입장에서 주인이신 하나님으로 불렀던 것이다. 또한 주인이 하인에게 명령만 내리는 것이 아니고 돌보아 주어야 하듯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고 돌보고 계심을 확신했기 때문에 떠나라고 하실 때에 떠날 수 있었다. 향방을 알지 못하지만 가라 하면 무조건 순종할 수가 있었다. 종이 주인의 소유로 주인의 명령과 그의 뜻에 따르는 생활을 하듯 아브라함은 주 하나님의 소유로 주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신앙의 조상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태도도 사랑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인이 주를 섬기듯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복합된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여호와 이레 ~ 준비하시는 하나님(창 22:13~14)
여호와 닛시 ~ 여호와는 나의 깃발(출 17:15)
여호와 살롬 ~ 여호와는 나의 평화(삿 6:24)
여호와 체바오트 ~ 만군의 여호와(삼상 1:3)
여호와 메가 디시 캠 ~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출 31:13)
여호와 로이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 23:1)
여호와 마케 ~ 멸망케 하시는 하나님(겔 7:9)
여호와 삼마 ~ 함께 계시는 하나님(겔 48:35)
엘 로이 ~ 감찰하시는 하나님(창 16:13)
엘 샤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창 17:1)
엘 올탐~ 영원하신 하나님(사 40:28)

둘째: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성도의 자세

1)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긴다는 것은 적극적으로는 그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는 것이고 소극적으로는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것이다. '망령되이'란 '파괴적으로, 거짓되게, 무익하게'라는 뜻이다.
과연 유한한 인간이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도 했다. 하나님의 정의를 내린 사람들을 몇몇 들어보자. 플라톤은 하나님을 영원한 정신이요 선의 원인이라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의 제일 근원이라고 하였다. 라이프니츠는 세상의 도덕적 창시자라고 하였으며, 헤겔은 절대 정신이라고 불렀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소홀히 사용한다면 이런 자에 대해서는 죄 없다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서 입으로 하는 고백은 오히려 그의 이름을 기만하는 행위가 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앙고백을 하면서 그 고백대로 살지 아니한다면 그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모독하는) 자 될 것이다. 출 20:7의 "죄 없다 아니하리라"는 말은 정죄('定罪)한다는 말이다. 죄의 결과는 말 2:2에 나온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2)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라(시 34:2~3)
성경에는 찬양(찬송)이라는 용어가 약 400번 나오는데 이 단어가 쓰인 문맥을 살펴보면 그 대상이 하나님으로 일관하고 있다. 시편의 주제는 한마디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것이다. 찬양을 받으실 분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누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가? 시 103:1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성도들, 제사장들, 의인들, 구속 받은 사람들, 자연의 모든 것 즉 숨쉬는 것 모두를 포함된다. 찬양의 때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즉 언제나 찬양해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설교도 필요 없고 기도할 이유도 없겠지만 찬양만은 계속될 것이다. 찬양의 장소는 성소에서뿐 아니라 침상에서도(시 63:5~6), 해 돋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어디서나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엡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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