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성도의 기도 (마 6:5~8)
21. 성도의 기도 (마 6:5~8)
  • 주성호
  • 승인 2018.05.21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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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는 사람을 상대하는 행위이나, 기도는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으로 성도에게 있어선 필수적인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기도를 중요시하므로 의무화했는데 매일 드리는 기도 시간이 하루 세 번 있었다.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어디에 있든지 정한 시간이 되기만 하면 두 가지 기도문을 암송하였는데, 그것은 쉐마(Shema)와 쉐모네 예스레 18(Shemoneh esreh 18)이었다.
특히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그 시간에 일부러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큰길어귀나 회당에 이르러 기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주목 받으려 했는데, 예수님의 눈에는 바로 그것이 거슬렸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를 하려면 차라리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기도하라. 기도는 말을 장황하게 많이 늘어놓아야만 되는 것이 아니고 비록 짧을지라도 진정으로 드리는 기도가 중요하며 하나님은 우리의 구할 것을 이미 모두 알고 계시므로 문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 기도하는 장소(5~6절)

1)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5절)
그 당시 유대인들이 정한 기도 시간이 되면 암송하는 쉐마(Shema) 기도문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오시기 오래 전부터 유대인들은 고정된 기도의 틀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침과 저녁에 의무적으로 암송하여 온 일종의 신앙 고백문이 쉐마이다. 쉐마는 유대인은 물론,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해 주변의 에세네파, 일반 유대인들에게도 철저하게 지켜졌던 기도문이다. 유대 소년들이 말을 배우자마자 그 부모로부터 가장 먼저 암송 교육을 받는 것이 이 기도문으로서, 12세 이상의 소년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아침과 저녁으로 두 번씩 암송해야 한다. 쉐마 기도문은 민 15:37~41, 신 11:4~9, 13~21의 내용을 중심으로 되어 있다. 쉐마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에 행할 때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그 외에도 테필라 기도문이 있다. 그것은 하루 세 번씩 하는 6복 기원문인데 후에 12복이 첨가되어 18복 기원문이 되었다. 또 카데쉬 기도문도 있는데, 이것은 회당 기도문으로 안식일 예배 후 전원이 한 목소리로 암송하는 공동 기도문이었으며 우리의 주기도문과 비슷하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열심히 기도했는데 왜 문제가 되었는가? 기도 시간이 되면 특히 외식하는 자들은 일부러 사람이 많이 모이는 회당이나 큰 길거리 어귀를 찾아가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기도하므로 사람들에게 과시하며 사람들이 자기들을 알아주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서는 간절함이나 진실성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2)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6절)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강한 충고를 주신다. 기도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상대하는 고로 너희들이 기도할 마음이 있으면 차라리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하셨다. 왕하 4:33의 엘리사의 기도나 단 6:10의 다니엘의 기도는 개인 기도의 좋은 모델이 된다. 골방(tameion)이란 자물쇠로 잠글 수 있는 곳간을 가리킨다. 이곳은 외부적 영향이나 자신을 미화시키는 어떤 의도도 배제할 뿐 아니라 자신의 모습 그대로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장소가 되기 때문에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 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골방 같은 것은 없지만, 또한 일부러 골방을 찾아 다니며 하루 몇 번씩 기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정신은 살려 나아가야 한다. 기도의 장소가 어디든 상관없이 골방을 만들어 하나님과 은밀히 교통하는 삶은 성도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둘째: 참된 기도(7~8절)

1) 중언부언하지 않는 기도(7절)
참된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장소도 중요하지만 기도하는 말(내용)도 중요하다. 중언부언(battalogevw)은 말더듬이 '바토스'(batto")에서 온 말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치 개구리가 '지저귄다, 종알거린다'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접촉이 많았으므로 그들이 무의미한 기도문을 반복하는 것을 많이 보았으므로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을 특별히 경계하신 것이다. 이방 종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말을 많이 하여야 그들의 신이 응답한다고 믿는 다는 것이다. 엘리야와 850대 1로 싸웠던 바알신의 추종자들은 갈멜산 위에서 하루 종일 '바알이여 응답하소서'를 반복하였고, 행 19:34을 보면 아데미 교인들은 '크다 아데미여'를 반복했다. 또한 불교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을 백만 번씩이나 반복 할 것을 권장하는 것이다.

조계종의 종정인 성철 스님이 해인사에서 앉아서 잠을 자면서까지 오랜 기간 참선을 하다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언론과 매스컴은 마치 신들린 듯 그의 삶을 칭송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보면 너무나 큰 문제가 있다. 그의 열반송 가운데 나오는 한 대목을 살펴보자. 그의 임종 전의 고백이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도다." 이는 번민이 극도에 달한 모습으로서 결코 평안치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몇 년 전에 한 말 가운데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님입니다"라는 말도 있다. 또 "내 말에 속지 말라 나는 거짓말하는 사람이여"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그가 진정 고승다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만, 10년 공부 나무 아미타불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평생 고행하고 수도했지만 거짓말하다가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니... 솔직한 인간적인 고백은 되지만 소망이 없다. 기독교적인 신앙관으로 볼 때 소망이라기보다는 절망적인 외침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핵심은 비록 짧은 기도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2) 구할 것을 미리 알고 계시는 하나님(8절)
주님께서는 외식적인 기도와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기도가 불필요함을 지적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요구와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전에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되고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그렇다면 기도가 필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절대로 아니다. 이방인들처럼,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처럼 중언부언하는 기도, 의미 없이 반복하고 되풀이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기도란 한 마디를 해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기도를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도는 유창한 말의 나열이나 반복되는 많은 말보다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솔직하게 아뢰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기도의 양이나 수를 헤아리기보다는 기도의 무게와 깊이를 더욱 중요시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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