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과학 부활!
초과학 부활!
  • 이구영
  • 승인 2018.03.30 0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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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라는 단어는 쇠퇴한 것이나 없어진 것이 다시 성하게 일어나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무슨 제도가 다시 부활했다. 누가 실패했다가 다시 부활했다. 이럴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특별히 기독교에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부활이라고 표현합니다.
부활이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다시 산 것을 말합니다. 죽었는데 다시 산 것!
끝이었는데 다시 시작되는 것!
영어로도 부활을 뜻하는 모든 단어들에는 공통적으로 re라고 하는 접두어가 붙어 있습니다.
다시, 다시, 다시입니다.
revive / revival / resurrection / resurrect / restored
부활은 여러 의미가 있지만 그중에 하다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는 뜻이 있습니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안 끝난 거, 그게 부활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부활을 이야기 하는 책입니다.
창세기에서 부활을 생각하게 하는 사건은 에녹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과 무지무지 친하게 지냈던 에녹이라는 사람은 이 땅에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산 채로 올라갑니다.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 뿐이 아닙니다. 엘리야라는 선지자도 죽음을 보지 않고 산채로 하늘로 올라갑니다.
[왕하 2: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죽어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에서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순간이동이 일어난 것이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왕래했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순간이동이 된 사건!
에녹이나 엘리야에게 일어난 이 사건은 여기가 끝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그래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

우리 눈에 안 보인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상식과 과학의 한계를 넘는 일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합리주의 시대, 이성주의 시대, 과학제일주의 시대의 오류 중에 하나는 우리 지식과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은 도데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인정해야 하는 것은 인간이 모든 것의 지배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지도 못하고 이룰 수도 없습니다.
한계를 분명히 지니고 있습니다.
태어남과 죽음도 마음대로 못하고, 사계절의 변화나 낮과 밤을 바꿀 쑤 없습니다.
한강이 흐르는 방향을 전부 바꾸어 놓을 수도 없고, 하늘과 땅을 뒤집을 수도 없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이 그토록 많으면서 모든 것을 다 주장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내가 모르는 것은 다 틀린 것이고. 내가 아는 것과 다른 것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인간의 죄요 무지요 교만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수 많은 일들을 사실로 전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심도 성경은 증거하고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사건 뿐 아니라 부활하심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이야기들이 비록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못한다 하여서 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인 일들이 아니라 초과학적이고 초이성적인,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한계를 뛰어 넘은 일들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이 대표적인 인물 바울 목사님은 부활신앙으로 똘똘 뭉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끝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는 모든 기쁨이나 슬픔은 단순한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힘든 일도 지나가는 과정이고, 기쁜 일도 지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에게 끝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부활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계가 있었습니다. 과학으로 이성으로 접근 불가능한 초과학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진 바울목사님의 삶은 그래서 강하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8]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
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그는 이렇게도 고백합니다.
[고전 15:19-22]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제자를 뽑을 때 첫 번째 기준이 부활신앙이었습니다. 끝이라고 이제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끝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지고 버티고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을 찾아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22절에 보면 초대교회가 가룟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는 기준이 나옵니다. 부활신앙이 기준이었습니다.
[행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이 부활신앙으로 뭉쳐진 바울 목사님의 고백을 우리는 오늘 다시금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이 절망의 시대를 이겨낼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포기와 낙망, 자살과 분노의 시대를 살아갈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부활신앙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바울 목사님의 입술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선명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확신을 주고 계십니다.

[고린도후서 4:7-10]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부활은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고, 이성적인 머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초과학적인 초이성적인 성경은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 천국, 부활 이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담대함, 승리의 확신, 영광의 삶을 강조합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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