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너희는 세상의 빛 (마 5:14~16)
12. 너희는 세상의 빛 (마 5:14~16)
  • 주성호
  • 승인 2018.03.19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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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복을 통해 진정한 복은 이 세상에서 받거나 누리는 기복 신앙에서 말하는 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내리시는 복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성도들이 반드시 받아야 할 하나님 나라의 복의 내용들로서, 죽은 다음에 이룩되는 천당의 개념보다 실제로 이 세상에 살면서 소유하고 누려야 할 복들인 것이다. 이 같은 복을 받은 성도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므로 부패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부패를 방지하며, 맛 잃은 곳에 맛을 내는 생활을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오늘의 본문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성도가 자기를 희생하며 소금의 역할을 할 때 그의 행실은 빛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어두운 곳에 속속들이 빛을 밝히는 일을 통해 사람들은 물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첫째: 세상의 빛(14~15절)

1) 빛의 특징(14절)

창세기 1장에 보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황에서 "빛이 있으라"는 말씀에서부터 창조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사실 하나님 자신의 속성이 빛이시다. 요일 1:5은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하나님은 영이시라"(요일 4:20)는 말씀과 마찬가지로 관사를 붙이지 않는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이다. 하나님이 빛이시라고 하면, 그것은 '하나의 빛'(a light)도 '그 빛'(the light)도 아닌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 본성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어두움이란 조금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요 1:9~11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니"라고 기록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어도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다. 하지만 사실 자기를 희생하는 소금이 되기도 쉽지 않지만 남에게 빛이 된다는 것은 어찌면 더 어렵기도 한 것이다.

과연 빛이 될 수 있는가? 우리가 빛 자체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달빛과 같은 역할은 가능하다. 햇빛의 비추임을 받은 달이 반사체로 달빛을 발하듯 나에게서 나오는 빛은 없을지라도,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빛 비춤을 받을 때 빛은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이것은 놀라운 빛의 원리이다. 소금의 특징은 녹아지므로, 즉 자신을 희생하므로 부패하는 이 세상에서 부패를 막는 일을 하지만, 빛은 어두운 구석구석 속속들이 찾아가서 어두움을 밝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실제로 어두움을 밝히는 위치에 있어야 하고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2) 모든 사람에게 비취는 빛(15절)

본문 그대로를 말하면 빛이 된 그리스도인은 어디서든지 숨겨지거나 감추어질 수 없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등'은 금속이나 도기로 된 기름을 담는 작은 그릇으로서, 심지가 들어 있고 손잡이가 붙어 있으므로 이곳 저곳으로 옮길 수 있다. '등경'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작은 등을 받쳐주는 받침대이다. 사람이 등에 불을 켜 등경 위에 올려놓으면 작은 빛이지만 방안을 밝히게 된다. 구약시대에는 성전의 금촛대에 밤낮 불을 켜두어 어두움도 밝히지만 제물을 태울 때에도 그 불이 사용되었다. 신약시대의 금촛대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계 1:20은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교회라"라고 기록한다. 사 2:2는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 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옛날에는 교회 하면 흔히 동산 위의 아름다운 건물에 빨간 종각이 있어 뗑그렁 땡그랑 종을 치며 풍경과 운치를 더해 주는 풍경을 연상하게 된다.
교회는 좋은 이미지만 준 것이 아니고 실제로 빛을 비추는 일을 해 왔다(달란트를 묻어 두거나 불을 켜서 말 아래 두어서는 안 된다). 옛날엔 빛이 필요하면 등에 불을 붙여 등경 위에 놓아 집안을 밝혔듯이, 오늘의 교회도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둘째: 영광 돌리는 빛(16절)

1) 선한 행실로

소금은 수동적인 입장에서 자기는 녹아지면서 부패를 방지하는데, 본문의 빛은 능동적으로 어두운 곳을 찾아 다니면서 빛을 비췸으로 밝은 세상이 되도록 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운동의 양면성을 발견하게 된다. 헬라어에는 '선'을 가리키는 두 개의 단어가 있다. ① '아가도스'(agaqo")는 그 성질이 선하다는 의미요, ② 칼로스(kalo")는 성질이 선할 뿐 아니라 매력 있고 아름다우며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나 성도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구체적인 방법은 '선한 행실'(kata erga, good works)에 의해서인데, 그것은 교회 생활에서가 아니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존경과 관심을 자아내어 정말 매력 있고 마음을 끌어 당길만한 모습을 보임으로 눈에 보이게 좋게 평가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행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구제를 해도~길에 나가 나팔 불며 요란스럽게 했고, 기도를 해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금식을 해도 티를 내고 남의 눈에 보이게 하므로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다. 선한 행실의 근거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광내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2) 하나님께 영광 돌림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선행의 목적은 어디다 두어야 하는가? 자랑이나 과시를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주님께로부터 빛을 받은 성도는 선행을 통해 빛을 나타내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된다. 특히 "아버지"라는 칭호는 산상 수훈에서 17회나 사용되었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는 본서의 독특한 어귀(語句)로서 마가복음에는 단 한번 사용되었다 (막 11:25). 성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것인데 영광은 빛 된 생활(선한 행실)로 성취된다. 벧전 2:2은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은 과연 빛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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