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나간 네팔선교 이야기
정신 나간 네팔선교 이야기
  • 유흥주
  • 승인 2018.02.12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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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나의교회 장애를 가진 이들의 선교여행

비행기서 어떻게 내리지? 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교수로 있는 대학동기가 카투만두 공항은 평양 공항처럼 트랙을 걸어 내려야 한다고 해서다. 비행기라고 고작 15년 전 제주행 국내선이 전부인 촌놈의 걱정이다. 8시간(실제론 6시간 30분)을 날아 네팔에 도착했더니, 화물용 리프트가 우릴 휠체어를 탄 그대로 지상으로 내려 주었다. 비행 도중 화장실은 기내용 휠체어를 타고 이용했다. 그 휠체어를 KTX에 비치하면 좀더 편하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괜찮을 듯했다.

카투만두 공항을 빠져 나왔다. 우리를 환영 나온 독립교회인 비자타교회 Ishwor Kapri 목사님과 아들 Yuhanna가 일행의 목에 환영의 스카프를 걸어 주었다. 틈새로 주변 경관이 어둑어둑한 저녁 7시의 풍경이 낮설지 않다. 우리네 한적한 시골 오일장 모습이었다. 네팔이 한국 5~60년대 수준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수도의 공항인데‥ 하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호텔 입구에 들어섰다고 통역을 맡은 박권사님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속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한국에서 통보받기를 별3개의 호텔이라 했는데,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서울 종로 뒷골목 여인숙이었다. 암담한 생각으로 차에서 내렸지만 곧 위로 받을 수 있었다. 외형과 방 아니 객실 안의 인테리어나 집기들은 여인숙이었으나, 60년대 한국, 아니 지금 여인숙에 없는 경사로와 문턱 없는 방 구조, 화장실 등은 분명 놀라운 수준이었다. 다음날에서야 보게 된 호텔 주차장 구석에 공용 장애인화장실이 있는 것도 놀라웠다.

11시쯤우리 ‘미시오데이(MISSIO DEI) 네팔장애인선교팀’의 베이스캠프인 비자타교회에 도착했다. 교회는 개인집 3층 건물이었다. 십자가도 없다. 드러내 놓고 전도할 수 없는 흰두교 국가인 상황에서는 당연한 모습이다. 모두 계단이었다. 남자 성인 4~5명 3대의 휠체어를 들어서 올라갔다. 가장 무거운? 박권사부터 옮겼다. 예배당으로 쓰는 2층에 들어섰다. 강단이 있고 중앙에 사각기둥 2개 있다. 강단 왼쪽으로 드럼, 기타, 엠프 시설이 놓여 있었다. 좁아 보였는데 200명 가량이 앉아서 예배드린다 했다. 바닥은 앉아서 예배드리도록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도착 다음날인 25일은 2개의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자립생활운동과 활동보조인에 대한 내용들이다. 예상보다 많은 100여명이 모였다. 생소한 내용이지만 적어 가면서 진지하게 듣는 모습이었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남녀가 중앙(기둥)을 기점으로 남녀가 따로 앉아있는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적 관습으로 따로 앉아서 예배 드렸다는 사진들을 현실에서 보게 되었다. 25일 강의는 장애인교육과 부모교육 2강의는 더욱 관심을 받았다. 장신대 기교과에 재학 중인 박기주 청년이 너무 긴장 하면서 강의를 하다 힘들어 중단 되었을 때는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황권사님이 부모교육을 강의할 때는 많은 여성들이, 간혹 남성들도 고개를 끄떡이면서 동감되어 가는 느낌을 받아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26일은 오전에 장애인단체가 운영하는 시설방문이 있었다. 가이드를 맡은 Yuhanna 에 의하면 네팔정부와 카투만두 시로부터 보조를 받는다 했는데, 최근 해외로부터 지원받은 장애용품을 시중에 몆배의 폭리로 팔다가 적발되기도 했다고 한다. 선입견 탓일까 일정 내내 모든 게 곱게 보이지 않았다. 네델란드 신부가 총 책임자인 듯했다. 네팔장애인들이 관리하고 운영하는 듯하다. 브리핑 받기로는 1700억을 모금해 병원, 학교 등을 짓겠다 했는데‥ 그간 받은 보조금으로 무얼 했는지, 수용된 장애인들은 상거지에 시설은 돼지우리 같았고, 설상가상 각 방은 밖에서 자물쇠로 잠그게 되어 있었다. 비장애인이나 외국 사람들에게 불쌍하게 보이려는 컨셉으로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장애인 당사자의 눈으로, 성도의 40%가 꽃동네 같은 시설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담임목사로서는 분노와 절망을 느꼈다. 이제 군부독재를 끝내고 민간정부가 들어서서 장애복지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기본계획을 세울텐데, 이러한 단체들이 향후 네팔복지에 근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엄습해왔다.

오후 카투만두에 소재한 영어학교를 방문하고 학생들과 미팅을 가졌다. 솔직히 표현하자면 운동장서 조례하는 형식이었다. 비록 교실은 칠판도 없거나 그냥 벽돌 벽이 보이는 교실의 학교지만, 우리식으로 보면 외고, 특목고로 잘사는 집이나 상류층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다. 이 아이들에게 장애인은 거의 볼 수 없는 존재이거나 불쌍한 존재이었다. 그들 앞에 비록 외국서 왔지만 장애인들이 와서 귀빈 대접을 받고, 자신들은 꿈을 이루고 행복한 존재라 하니 많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장애인들이 자신들에게 인생은 소중하고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기에 포기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 꿈을 이룰 것이라고 하니 어떠했을까? 나중에 통역을 한 박권사님이 선생님들로부터 감동과 도전이 되는 시간이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저녁 즈음에 카투만두 시장이 호텔로 우리를 만나러 왔다. 20년 내전이 끝나고 작년 민선시장으로 당선된 여성시장이다. 미간에 붉은 점을 찍은 것으로 보아서 흰두교인임을 알 수 있었다. 서로 참석한 사람들이 자기 소개를 가졌다. 나는 당당하게 목사임을 밝혔고, 한국서 2번째로 큰 장애인 단체를 설립했고, 장애계와 교계에서 장애인정책을 제안한다고 했다. 시장은 뭔가 적기도 했으며 자신은 장애인 인권과 교육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향후 협력관계를 맺고 싶다고도 했다. 다음날 시장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서, 대지무상지원을 비롯한 모든 행정적 지원을 약속했다. 그래서 우리 선교팀은 주님께서 종교를 넘어 우리로 카투만두 시와 연결고리를 주시고, 이를 통해 시설 중심이 아닌 자립중심의 아젠다(Agenda)를 심을 기회를 주심에 감사했다. 한국으로 돌아가 시장의 제안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계획과 실천방안을 세우기로 했다.

27일은토요일이다. 그런데 네팔은 토요일에 쉰다고 한다. 그래서 현지인들은 주일예배를 토요일에 드린다. 11시에 도착한 교회는 찬양팀 찬양인도가 이어지는 동안 성도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고 어느새 예배당을 가득 채웠고, 비좁은 공간으로 인해 여성 쪽에 앉아있던 아이들은 강단 위로 올라와 예배를 드려야 했다. 청년 찬양팀의 리드로 예배 분위기는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알아 들을 수 없는 가사였지만 기도와 찬양이 반복되면서 방언들 터져 나왔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들을 통해 우상이 가득한 그들의 살의 현장에서 물러설 수 없는 영적싸움에 대한 긴박감이 느껴졌다. 그 속에서 잊혀졌던 뜨거움의 기억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한국말을 영어로, 영어를 네팔어로 통역하는 2중의 과정으로 간절함과 뜨거움이 식기는 했지만 장애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들은 말씀을 만나는 장애인들에게 전해 달라고 주의 이름으로 부탁했다. 이러한 것들이 한사람 한사람을 바꾸고 나중에는 전체를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배시간은 미시오데이 선교팀이 은혜가 된 시간이었다.

28일은 오전부터 손님을 맞는 관계로 분주했다. 카투만두 시에서 활동 중인 장애 관련 NGO 단체 4곳에서 호텔로 찾아온 것이다. 점심대접을 우리가 하는 형태로 시작된 만남은 예정시간보다 1시간 가량 초과되었다. 나도 20년간 장애운동을 하고 단체를 설립하면서 재정적 어려움을 느꼈던 심정으로 그들도 발언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얻어 후원을 호소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정보다 늦어진 이유로 점심을 건너 뛰었다. 기존의 교회나 선교단체의 선교활동은 집회 중심이라 정해진 시간으로 삼시세끼는 보장 되지만, 우리는 사회선교형태를 지향하기에 집회는 물론이고 현장방문과 미팅 그리고 향후 협력을 통해 사회문제해결을 기약하기에 시간이 그때 그때 미팅결과에 따라 선교기간 내내 들쑥날쑥 전날 예약된 시간을 맞추기 위해 네팔 감리교회 임근화 감독님을 만났다. 감독님은 우리를 네팔 감리교회 본부로 안내해 주셨다. 본부건물은 종교시설이 아닌 숙박시설인 게스트하우스로 등록되어 있다고 했다. 종교시설일 경우 흰두교주민들의 항의나 무장단체들의 약탈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 했다. 다시금 영적전쟁의 최전선에 있음을 느꼈다. 한국은 얼마나 행복하며 그래서 군기가 엉망인 군사들인지도 새삼 깨달았다. 감독님의 개인적인 사역의 경험담, 네팔감리교회의 현황과 네팔선교 시 주의사항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는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일행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감독님의 깊은 영성이었다. 네팔감리교회의 미래는 밝아 보였다.

29일은 모든 공식일정을 끝내고 쇼핑하는 날이다. 여유롭게 10시에 샌드위치와 계란과 커피로 아침식사를 하고 11시 30분쯤 봉고를 타고 제법 큰 전통시장으로 출발했다. 근처 공원에 차를 주차하고 도보로 시장을 향했다. 중앙선도, 차선도 없는 도로에 차와 오토바이, 사람이 섞여 움직이는 곳에 휠체어가 합류하니 지나가던 운전자도, 사람도, 교통경찰까지 신기하듯 쳐다본다. 그것도 외국인이 중증장애인이니 더욱 신기해 보인 듯했다. 엄홍길재단 사무국장도 왜 하필 네팔이냐? 할 정도로 비장애인도 힘든 네팔에 외국인 장애인이 간다는 것은 생각 못한 사건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네팔장애인들도 길거리를 활보했으면 좋겠다. 결국 4시간 가까이 쇼핑을 한 결과 먼지와 매연만 실컷 뒤집어 쓰고 수분크림과 네팔커피가 다였다.

30일오후 3시 카투만두 공항에 도착했다. 오던 날처럼 비자타교회 목사님과 사모님 가이드를 했던 아들, 그리고 Concerd Nepal 이라는 NGO 단체 사람들이 환송을 해주었다. 공항 앞에서 우리는 동그랗게 모여 기도로 헤어지는 아쉬움을 달래고 서로를 축복했다. 출국수속을 밟고 우리는 내리던 반대로 화물용 리프트로 비행기에 올라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영화 2편을 보고나니 곧 인천공항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4시간 45분 만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번 미시오데이 네팔장애인선교는 미친 짓이었다. 미자립교회가 웬만한 교회 1년치 월세를 들고, 그것도 7박8일 동안 해외선교를 나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중중장애인이 주가 되어진 팀으로, 세계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말이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상식일 뿐이다. 하나님의 선교와 목회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시금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심정으로 말하고 싶다. 한국교회 70%인 대다수 미자립교회 목사님과 성도들께 제안드린다. 눈에 보이는 조건에 움추리지 말고 주 앞에서 당당하게 하시고 싶은 계획을 실천에 옮기시라고 말이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어서 행동에 옮기자고 그래서 주님께서 목회와 선교를 이끌어 가시도록 자리를 만들어 드리자!! 나만이 우리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실천에 옮기시라고‥

(고전 1:26~31/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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