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는 축복이다(4)
장애는 축복이다(4)
  • 유흥주
  • 승인 2018.01.24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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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는 1934년에만 30-40만에 이르는 사람들을 강제 불임시켰으며 이중 상당수가 수술 등의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 ‘단종법’은 특정 인종을 표적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집시는 반사회적 형질을 가졌다는 이유로 이 법의 철퇴를 맞았고 동성연애자들도 이 법의 적용을 받았다.

이렇게 ‘단종법’은 나치 정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가려 단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급기야는 1939년에 히틀러는 정신병자들과 지적장애인들을 아예 죽여 없애는 소위 말하는 ”자비법“을 몰래 시행하였다. ‘단종법’은 공식적으로 시행했지만, 이 ‘자비법’은 작전명 T4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시행했다. 나치의 주장은 심한 장애로 고생할 바에야 죽는 게 낫다는 논리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죽여준다는 히틀러의 광적 살인법이다. 이런 명령에 의해서 피해를 본 사람들은 주로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는데 정신병자들과 지적장애인들 이외에 생산성이 없고 정부에게 귀찮은 노인들을 싸잡아 죽여 버렸다. 나치 정부의 광기가 극에 달하면서 T4 작전에 의해 죽은 장애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 버렸다. 1939-45년 사이 T4 작전에 의해 죽은 장애들이 20-25만 명으로 추산한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진멸하려는 소위 인종 청소를 시도 했으며 그의 이런 광기는 지금도 세계도처에서 살아나 그 도를 더하고 있다.

일반적으로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근거를 레위기서로 든다. 특히 자주 인용되는 레위기서 21장 17~21절은 제사장이 되는 자격을 논하는 부분이지 장애인 자체의 존재를 이야기 한 것이 아니다. 레위기서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제사장 자격과 제사의식, 제물의 성별에 대한 규례를 다룬다. 그러므로 장애인에 대한 존재를 논하는 것은 레위기서의 기록 목적을 위반하는 것이다.
오히려 레위기서는 인간적 존재로서 장애인에 대해서는 당시 시대적 사고로는 납득이 되지 않을 만큼 진보적이다. 레위기 19장 14절의 내용(레 19:14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을 보면, 현대의 장애인식개선과 편의시설 확충을 위한 기독교 NGO 단체의 슬로건을 연상시킨다. 이 문장이 다윗 왕 시대 또는 포로기시대의 작품이라고 믿어지는가? 가깝게는 500년 전 종교개혁의 장본인인 마틴 루터 신부의 장애인에 대한 생각도 이보다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마틴 루터 신부는 장애를, 특히 정신지체(발달장애) 장애인에 대해 "잘못 태어난 사람들"이라 말하면서 그들을 '영혼이 없는 육체'로 보았다. 심지어 '마귀가 그들의 영혼이다'라는 편향된 시각을 소유한 것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서두에서 인용한 나치 관련 내용은 한국사회에서 불과 십여 년 전에 공공연하게 논란이 되었던 것이다. 다운중후군의 유전적 위험성을 근간으로 강제 불임수술에 관한 인권침해 논란과 이에 대한 다운중후군 장애인들의 절규어린 호소들이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발달장애인법이 시행되고 있는 지금도 미인가시설에서 자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교회와 목회자들은 어떤 생각을 견지해야 할 것인가? 약 3년 전에 발달장애아동을 자녀로 둔 어머니와 상담을 한 적이 있다. 그녀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자신의 아이를 보고 "이 아이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식으로 설교를 해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다며 "정말 그런가요?" 라고 물었다. 저는 비장애인의 입장에서는 예수를 영접하는 과정과 방식 그리고 표현에는 당연히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성경(마 19: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을 인용해 답을 했다.

사실 구원은 하나님의 불가침의 영역이다. 바울의 롬 2장 14~15절(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의 해석처럼 될 수 있으면. 한 영혼이라도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이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도 너무 교리화 되어 버렸다. 보수 한국교회의 신학적 논리를 제공하는 존 칼빈도 "모든 장애인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나타낸다"고 장애인에 대한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비단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우리시대의 비주류에 대한 교회와 목회자들의 생각에 대해 한번쯤은 검토가 필요하다. 그들에 대한 인식이 진정 성경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 성경구절을 취사선택 하여 자신과 세상의 논리를 포장한 것인지를 말이다. 이제 더 이상 건강과 아름다움을 축복이라 말하지 말아야 한다. 1등만이 성공이라고 주장하며 줄 세우기 하는 세상 논리를 강단에서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그 논리가 잘못 되었음을 시인하고 사과해야 한다. 그리고 60대부터 80년대까지 축복의 은총 가운데 들지 못해 좌절과 믿음의 갈등을 앉은 체 교회를 떠나간 양들을 찾아 위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미래시대에 한국교회가 풀어야 할 첫 번째 생존방식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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