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애통하는 자의 복 (마 5:4)
4. 애통하는 자의 복 (마 5:4)
  • 주성호
  • 승인 2018.01.22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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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진리를 접해보거나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있다. 그 가운데 역설적인 논리를 사용한 진리들도 있다. 그 중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게 된다.
~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진다.
~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대접을 해야 한다.
~ 소유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것이 주는 진리의 의미를 신앙적으로 받아드리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보통 사람들이 애통하는 이유가 있다면 대부분 외적인 이유, 곧 육체와 관련된 애통을 들 수 있다. 육체적인 질병이 애통의 이유가 된다. 갖가지 고통, 육신의 죽음, 사업의 실패, 아무리 노력을 해도 뜻을 이루지 못했을 때 ...... 등이 애통의 이유가 된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애통은 내적이요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애통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면 죄의식을 가지게 되고,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게 될 때 애통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애통은 자신에게 복이 되고 진정한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 본문의 교훈이다.

첫째: 애통하는 자

1) 애통이란?
'애통'(펜도스, pevnqo")이라는 낱말의 뜻은 '슬픔' 또는 '비관'의 뜻으로서, 헬라어 중에서 슬퍼한다는 의미를 가장 강하게 나타내는 낱말이며, 주로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이나 죄에 대한 통탄함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무엇 때문에 애통한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으나, 산상수훈의 성격이나 내용이 주는 의미로 보아서 심령이 가난해지면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되는데서 나오는 애통임을 알 수 있다.

약 4:8~9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웃으신 기록은 한 번도 없지만 우신 기록은 세 번 나온다.

① 요 11:35를 보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조용히 우셨다. 개인을 위한 인간적 눈물이다,
② 눅 19:41에는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소리 내어 우신 장면이 나온다.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우신 것이다.
③ 히 5:7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큰소리로 통곡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을 위하여 우신 것이며, 종교적 의미를 가진다.

사실 웃는 일에서는 인생의 깊이가 터득되기 어렵다. 인생의 진리와 의미는 슬픔과 고통에서 경험 되어진다. 계 18:7~8에는 이 세상 종말의 때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당하는 극도의 애통에 대한 묘사가 있다. 이것은 '절망적 애통'이라고 부를 만 하다.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사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

2) 신령한 애통
그러나 본문의 애통은 믿음으로 가지게 되는 거룩한 애통으로서, 심령이 가난하면 애통하기 마련이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철저히 회개함에서 나오는 애통이다. 회개(repent)란 180도 방향전환이라고 여러 번 말씀 드렸다. 보통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와 접촉하고 거듭나는 순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애통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하면 할수록 과거의 죄에 대해 애통하게 되어 있다. 또 은혜를 사모할 때 신앙이 성숙하지 못함을 의식하면 애통하게 되어 있으며, 구세주의 대속의 고통(십자가)과 그의 은총을 깨닫고 생각하며 그 무한한 사랑에 접하게 될 때에도 애통하게 된다.
찬송가 405장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의 작사자인 존 뉴톤(John Newton)이 고백한 것과 같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를 깨달을 때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영적인 애통, 즉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며 애통하는 것은 영육 간에 만족한 평안과 기쁨을 주는 근원이 된다.

둘째: 위로를 받음

1) 위로란?
'위로'는 '파라칼레오'(parakalew)라는 단어인데, '곁으로'라는 뜻의 '파라'(para) 와 '부른다'는 뜻의 '칼레오'(kalew) 의 합성어이다. 죄에 대해 슬퍼하고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이 곁으로 불러주시므로 진정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눅 2:25~27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가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며 마침 그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위로자'는 그리스도의 대명사요 또한 성령의 대명사이기도 하다(요 14:16; 26:15). 정리하면, 죄에 대해 슬퍼하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를 받게 되니 그것이 복이 된다. 육신적으로 보면 이 세상에서도 위로가 되는 것이 많이 있다. 자식, 돈, 부인, 남편, 아내, 친구 등 .......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시편 94:19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진정한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한 것이다.

2) 하나님의 위로
사 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 66: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죄에 대하여 애통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애통하는 자에게 사죄의 선언은 위로가 될 뿐 아니라 즐거움과 큰 기쁨을 소유하게 되며(시 4:7; 126:5~6)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시험을 당했으나 그것은 잠깐이다. 우리가 산 소망과 함께 성령의 능력의 도우심을 받을 때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3, 8)라는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 그러나 신령한 애통 즉,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요 영원한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복된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감사하며, 감격한 마음으로 찬양하고 복을 누릴 뿐 아니라 기쁨을 나누는 복된 삶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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