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는 축복이다(3)
장애는 축복이다(3)
  • 유흥주
  • 승인 2018.01.17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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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Disability 도 '무능한'이라는 뜻인데‥ 그것이 '다른 능력'이라니 이해가 않된다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영어도 모르고 하는 무식한 소리 아닌가? 결국은 Handicap 이나 Disability 는 동의어로 쓰일 수 있는데 말장난 같다 하는 의문 또한 들 것이다.

여기서 Handicap 은 inable 의 뜻을 담은 "무능한"의 단어이다. 즉 inable 은 "선천적" 으로 무능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레위기서나 요한복음 9장의 장애에 대한 논쟁처럼, 장애인은 존재적으로 부정한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존재가 제물적인 가치나 제사장으로서 성직을 감당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Disability 는 기능적 손상을 입은 이후 또는 부위에만 한정하여 기능적으로 '무능한'이라는 의미를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different able "다른 능력"의 가능성을 포함하는 단어가 된다는 것이므로 Handicap 과는 전혀 다른 부정어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교회와 감리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different able 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공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진보정권의 교육논리와 개인의 능력과 성취에 강조점을 두는 보수정권의 논리 속에서 갈등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와 나는 "다른 능력"이라는 것이 분명한 우열을 가리고, 이를 통해 정치ㆍ경제ㆍ사회적인 서열을 세우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다른 능력"은 모든 피조물에 필수적인 구성요소로서 공급되어지는 '하나님 형상(Imago Dei)'으로서 "다른 능력"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차이에 따른 서열이 아니라 서로 존재 간의 동등함을 확인하는 차이라는 것이다.

‘같음’은 비교와 서열을 허용하나 '다름'은 비교나 서열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서로 개별적으로 동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저 존재하는 자체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롬 12:6~8/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 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가 다르고 주의 피로사신 몸 된 교회를 위해 역할과 가치가 다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를 교회 안에서 가치와 서열을 매기지 않는 것과 같다. 이에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 형상의 특징이며 그분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너와 나는 Why? 가 아니라 How? 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주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의 가치관, 성공이라 틀에 모두 이들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희생을 강요하는 세상의 기준을 교회도 따라 가고 있다. 학생이 없어 문 닫는 학교가 생기는 세상에 아직도 소수 학교를 위한 입시에 편승하는 교회들이 있다.

다름이 창조의 원리임에도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교회와 성도들‥ 누구의 탓일까? 장애인도 다름인데 그들을 위한 특수학교 설립을 혐오시설로 반대하는 모습들에서 포로기 이후 천민공동체의 개방적 이스라엘 종교공동체가 폐쇄적 시온이즘으로 전락한 유대교의 완악함이 보인다.

오늘 한국교회 특히 사회적 구원의 시대적 사명 앞에서 탄생한 감리교회가 260만 장애인당사자들과 1천만 가족들을 구원할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첫째로, 아마도 외모적 차이와 기능적 한계를 다름으로 동등하게 살아가도록 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아멘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둘째로 그들이 다름을 가지고 지역사회에 정착하고 공헌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창조섭리(창1: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와 요한복음의 예수의 선포(9:2~3/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에 근거하여 인식개선에 앞장서는 일이다.
또한 장애인들에게 사회복지적 개념의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것이라도 그들이 필요한 것을 소통하고 원하는 방식과 시기에 맞추는 것이다. 그것은 심방에 앞서 사전에 소통하고 가급적 원하는 날짜에 원하는 장소를 맞추는 것과 같다. 그러면서도 더욱 중요한 것은 서로 다름과 다른 능력을 소유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아야 한다. 그 다름의 너와 나의,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교류하며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여 온전한 형태의 교회공동체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그 다름이(장애인) 그저 함께 존재하는 상징적 가치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값비싼 피규어 처럼 악세사리로 바라보고, 소유하는 것을 넘어 무언가를 창조하는 에너지(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실질적 변화가 일어 나려면 철저히 세속으로 물든 교회는 뼈를 깎는 반성과 체질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마치 먹고 싶은 것만 먹어 살찐 자신을 돌아보고 혹독한 다이어트에 들어간 여인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미용에 대한 부러움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온갖 성인병에 시달린 비만으로부터 탈출이며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내려진 결단이다. 단순 신체적 차이에 대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지 못한다면, 피부색과 문화, 사고의 차이를 가진 이들은 진실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들이지 못할 것이다.

결국 지금의 교회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며, 주께서 당신의 촛대를 옮기실 것(계 2:5/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회개하며, 너는 처음 일들을 행하라. 만일 그렇지 않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너에게 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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