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는 축복이다(2)
장애는 축복이다(2)
  • 유흥주
  • 승인 2018.01.10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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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그것은 명칭에 대한 통일이다. 즉 유독 아직까지 감리교회와 목회자들만 사용하는 '장애우'라는 용어의 통일문제이다. 장애우(友)는 특정단체가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장애인에 대한 혐오감을 불식시키기 위해 사용을 유도한 용어이다. 현재 장애인 당사자들의 의견을   모아. 3자로서 객관적 개념인 ‘장애인’을 공식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정부 또한 ‘장애인’을 사용하고 있으니 감리교회도 이를 따라야 할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장애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를 쉽게 알아보는 방법은 장애인을 어떻게 호칭하는지를 들으면 알 수 있다. 구약성경 레위기서 21장 17~21절을 보자 ‘아론에게 고하여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18) 무릇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못할지니 곧 소경(61번 나옴, 시각장애인(3)에 해당(레아, 바울))이나 절뚝발이(13번 나옴, 지체장애인(1)에 소아마비(야곱, 므비보셋))나 코가 불완전한 자(안면장애인(13))나 지체가 더한 자나 (19)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지체장애인(1)에 ①해당) (20) 곱사등이나 난장이나(1번 나옴, 지체장애인(1)에 ⑥해당),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문둥병자/한센인 있는 자나 불알 상한 자나 (21)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벙어리(19번)는 언어장애인(5)와 청각장애인(4)에 해당(모세의 경우 언어장애인) 모두 해당, 귀머거리(11번)는 청각장애인(4)에 농아인, 앉은뱅이(5번)는 지체장애(1)에 ①해당 또는 척수장애, 양하지 마비)는 나아와 여호와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아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지 못하느니라’로 기록되어 있다.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이고 혐오스러운 뉘양스가 강하다. 아직도 이런 용어를 설교단상에서 사용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이는 250만 장애인과 천만의 가족들에 대한 무관심과 무식함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모습이다.

현재 개별 장애인에 대한 명칭과 분류는 의학적(醫學的) 관점으로 15개 범주로 나뉜다. (1). 지체장애인(肢體障碍人) (2) 뇌병변장애인(腦病變障碍人) (3) 시각장애인(視覺障碍人) (4) 청각장애인(聽覺障碍人) (5) 언어장애인(言語障碍人) (6) 지적장애인(知的障碍人) (7) 자폐성장애인(自閉性障碍人) (8) 정신장애인(精神障碍人) (9) 신장장애인(腎臟障碍人) (10) 심장장애인(心臟障碍人) (11) 호흡기장애인(呼吸器障碍人) (12) 간장애인(肝障碍人) (13) 안면장애인(顔面障碍人) (14) 장루ㆍ요루장애인(腸瘻ㆍ尿瘻障碍人) (15) 간질장애인(癎疾障碍人) 이다.

이들 중에 ⑼~⒂번까지는 내부 신체 장기의 이상과 기능저하에서 오는 만성질환을 장애로 보고 있어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2)의 뇌병변장애 안에는 뇌졸중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선진국에서는 당뇨병도 장애로 분류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한국국민의 20%가 당뇨를 앓는다는 최근 각종 통계는 국민 25% 네명 중 한명이 장애인으로 우리 모두가 장애에 매우 근접해 있는 ‘예비 장애인’, ‘비장애’인으로 불려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장애인은 소수가 아니면 누구나 장애로부터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제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교회의 인식은 물론 목회(牧會)적이고 신학(神學)적 고찰들이 이루어져야 할 때가 되었다.

미국의 예를 들자면 1990년대 '미국 장애인 법'이 제정되면서 장애인에 대한 정의와 인식이 획기적으로 바뀌게 된다. 즉 무언가 결여되고 부족한, 그래서 무능한 개념의 'Handicap'에서 그 사람만의 독톡한 다른 능력을 소유한 'Disability'로 바꾸어 사용하게 되었다. 즉 생산 가능한 기능적 능력만을 강조하는 획일적 자본사회의 개념이 아닌,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달란트적 개념에서 이해한 정의다. 이제 더 이상 서로 비교하여 우열을 기리고, 신체적 기능이 요구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고, 부족하고 결핍된 그래서 사회로부터 단절 대상이 되는 장애가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사지(四肢)가 건강한 사람만이 주류에서 사는 세상이 아니다. 여태껏 그 사고를 지지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제 나이 들어 기능적 능력이 저하되었다고, 자신들이 주장하던 그 논리에 사회로부터 퇴출되어 버렸다. 그게  지금의 장애인들과 무엇이 다를까 묻고 싶다. 100세 시대에 칠십이 되어 반 강제로 은퇴해야 하는 건강하신 어르신들께 답을 듣고 싶다. 신체적 기능의 고저(高低)를 따지지 말고, 축척된 지식과 숙련된 기술을 정점으로 하는, 젊은 이들이 없고 다른 능력을 존중해 달라고 요구하고 싶을 것이다. 

당신들이 건강하다고, 신체적 기능이 우월하다고 강조하면서 무시해 오던 절규들이 이제 당신들의 소리가 되었다. 그때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경청하고 함께 가는 방안을 마련했더라면, 지금쯤 무기력하게 손상되는 나의 몸뚱이와 삶에서 벗어나 일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성령께서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하신 소리(계2:29)에 경청하지 않아 골방과 양로원과 요양병원에서 슬피 울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기를 한국교회와 감리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용기 있는 역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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