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았더라’의 회복
‘좋았더라’의 회복
  • 민돈원
  • 승인 2018.01.09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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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장을 읽다 새삼스럽게 깊이 묵상하게 되는 단어가 7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좋았더라"는 단어였다. 즉 성경의 첫 시작인 창조의 역사는 긍정적인 역사와 함께 매우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는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하나님이 명령한대로 되었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7일간의 창조기사가 끝나는 창2:3까지 “복”이라는 단어가 3번 등장하고 있다. 첫째가 바다의 생물들과 하늘의 새들에게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 는 종족번식이다. 둘째는 짐승을 종류대로 만드신 후 사람은 하나님 형상대로 만드시고 나서 바다의 생물과 새들에게 명령할 때는 없던 두 가지-“정복하라, 다스리라”-가 더 추가되고 있다. 인간에게 주신 특권이다. 그리고 일곱째 날 안식하면서 이 날을 복되게 하셨다. 라고 말씀하셨다.
 위와 같은 말씀의 의미를 나는 목회현장에 이렇게 적용하고자 한다. 우선 목회자와 성도들이 반드시 하나님 명령대로 살 때라야 "좋다"(히브리어, ‘토브’, Good)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말씀을 외면하고 벗어난다면 결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뜻이 암시되어있다고 본다. 
또 “좋다.” 라는 선의 기준은 사람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그 증거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이 말씀은 신앙생활을 내 좋은대로 하면 나를 나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요 교회를 나쁘게 만드는 원흉을 자처하는 시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결과 사회도 나쁘게 만들 우려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실제 목회현장에서 피부로 느끼는 정서는 처음 목회할 때와 신대원 입학이후 29년이 지난 최근의 시점에서 볼 때 한 마디로 너무 변질된 점이 없지 않다. 그 대표적인 점 하나를 말하라 한다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자기편한대로 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는 가슴 아픈 현실이다. 전에는 부담이 될지라도 해야 되는 줄 알고 따랐다. 단지 팬(Fan)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으로 따르는 자(Follower)였다. 그러나 요즘은 내가 싫으면 그만이다. 는 식의 의식구조로 바뀌어 지고 있다. 아무리 좋은 교회로 출발했을지라도 내가 선의 기준이 되어버리는 한 그 좋은 교회도 나쁜 교회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수 밖에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좋은 것을 사람에게 모두 주실 때 복을 주신 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두 가지 명령을 추가로 더 주셨다는 것은 그마 만큼 책임과 사명이 크다는 뜻이라고 보아야 한다. 받은 복을 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시대적 사명과 역사성을 잃은 기복신앙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복을 받은 우리는 문화를 변혁하는 주체적인 자리에서 시대적 소명에 응답하는 영적실력을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 자연과 피조물이 어떻게 반응 했는지를 잘 보자! 그것은 명령한대로 그대로 되었다. 그 결과 좋았더라고 하지 않았던가? 

창1장은 7번씩이나 완벽하게 좋았다고 하실 만큼 결함과 부족함이 없는 좋음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좋은 목사, 좋은 리더, 속회 인도자, 좋은 속장, 좋은 선교회장, 좋은 교사, 좋은 찬양대원, 좋은 성도로서의 신(新) 창세기1장을
역설하곤 한다. 우리의 노래 가락이나 판소리 추임새, 그리고 춤사위에도 ‘(지화자) 좋다!’가 아니었던가?

이에 우선 교회에서부터라도 누구를 만나든지 서로 덕담이 “좋더라”라고 주고받을 수 있는 참된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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