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찟한 일이 있어도 티가 나지 않는 목회
섬찟한 일이 있어도 티가 나지 않는 목회
  • 민돈원
  • 승인 2017.12.02 1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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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아무리 많이 낳아 길러도 자식 둔 부모입장에서는 하나하나가 그 무엇보다 귀하다. 요즘처럼 기껏해야 두 자녀인 시대이다 보니 부모의 자기 자녀 대한 애착과 투자는 각별하다. 게다가 내 주위에 외아들 외동딸을 둔 가정이라면 더이상 말할 나위도 없을 것 같다.

그러면 목회자에게는 어떠할까? 목회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르기에 획일적인 잣대로 규정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주위에서 만나는 목사님의 자녀들이 자녀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상황도 접하는 경우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다지 좋지 않은 가정환경에서도 심지어 과외 없이도 출중한 실력을 가지고 극소수의 고시(때로는 수석)에 합격하는가 하면 선한 일에 부요한 위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녀들이 있음을 만나게 된다. 그런 자랑스러운 자녀들을 둔 목회자들로서는 그들을 키우면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 무언가의 남다른 희생과 눈물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자녀를 내 품안에 끼고 키운다고 그렇게 잘 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자녀를 핑계대고 주님의 일을 소홀히 했을 리가 없다.

십 여 년 전 부산에서 은퇴하신 작은 교회 어느 목사님은 오래전이긴 하지만 시대적으로도 어려웠던 당시 그 분이 목회하는 동안 있었던 일중에 하루는 자녀들이 삼겹살을 사달라고 애걸복걸하는데도 그 애원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눈물겨운 기사를 읽고 직접 통화한 기억도 있다. 그러나 이후 지금은 그 두 아들 중에 한 아들은 교수로 다른 아들은 의사로 자랑스런 활동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주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믿음의 중심을 잃지 않고 키우려는 그 하나가 인간의 여러 가지 방법보다 탁월함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마음이 내게도 없지 않다. 그러기에 때로는 자식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 안쓰럽고 미안하기도 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지난 몇 주 전 아내가 출타하여서 잠시 늦둥이 아들과 함께 있을 때 일이다. 평소에는 잘 놀던 아들이 잠깐 방에 두고 불과 5분 전후 2층 목양실에 다녀온 사이 대성통곡을 하며 현관문까지 열고 울고 있는 것이다. 오후 6시 전후쯤 된 그 시간, 그 정도 우는 소리였으면 주위 민가에 들렸을 터이지만 누구 하나 돌보는 이가 없이 덩그러니 혼자 서럽게 울고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삭막한 마음이 들었다.

더 충격적인 일은 몇 일후 새벽에 일어났다. 새벽기도 하고 있는 중인데 그 강추위이고 새벽시간에 어린 아들이 사택에서부터 예배당까지 잠옷에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통곡하며 겁에 질린 채 달려들어 오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현관문이 손에 닿아 안에서도 쉽게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두 아들을 키우는 동안 이런 경우가 처음이다. 그 이후 최근 10여일 가까이 새벽기도회 나올 때마다 아내는 그 시간 같이 깬 아들과 함께 올 들어 가장 강추위가 지속되는 영하 10도 이상의 칼바람을 맞으며 1주일 이상을 유아실로 데리고 오는 경우가 잦아졌다. 이런 상태였으니 어린 아들의 몸이 온전할 리가 없다. 어제는 목이 아프다고 새벽 3시에 일어나 울고 있는 아들을 보며 어찌나 마음이 아픈지...

그런데 금요일 그날은 한 성도가 입원해 있는 서울에 아내와 함께 병원 심방하러 약속을 해 둔 상태였다. 그런데 전날까지 어린이집 잘 다녀온 늦둥이가 그날 새벽에 그런 것이다. 나중에는 열이 39도까지 올랐다. 아내는 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약속된 심방인지라 나라도 그곳을 먼저 다녀와야만 했다. 아들을 보면 한 시간이라도 아들을 빨리 데리고 가야 했지만 심방이후 2시가 넘어 다녀왔다. 목사의 삶은 늘 그렇다. 성도의 요청이 있을 때는 그들에게 맞춘다. 설사 요청이 없더라도 목사는 알아서 가야 한다.

그런데 하루 지난 토요일 새벽 2시에 또 다시 깨어 우는 아들,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 그래도 미련하리만치 새벽 기도의 자리를 지키려는 아내의 마음, 아기를 안고라도 새벽기도를 지키기 위해 20년 전 눈길에도 첫 아이인 갓난아이를 안고 기도할 때나 지금이나 우리 부부는 변함없이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이날도 그리했다. 내 자식 잠 더 자도록 엄마가 옆에 있어주면 그날의 그런 섬찟한 칼바람 맞지 않고 차디찬 맨발에 통곡하는 소리도 없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스스로 깰 때까지 두고 싶은 부모의 심정이야 목사인 나도 여느 사람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목사는 의당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아니 자기는 못해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철딱서니 없는 이들이 없지 않다. 그래서 목사는 아무리 해도 해도 티가 나지 않는다. 어쩌다 곧이곧대로 말하면 말한다고 목사의 타들어가는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이들은 되레 성화를 부린다. 그래서 우리 한국 사람들은 천국도 심지어 기분 나쁘면 가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기도 하는 일도 그런 것 같다.

만 두 살배기 아들이 새벽에 맨 발로 통곡하며 예배당으로 달려오는 그 충격이 목회하는 중에 일어난 여러 일중에 톱기사가 될 만큼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이유가 경솔하게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과 같이 단순히 정서적으로 불안해서가 아닌 만 두 살배기를 통해 무언가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인으로 나는 받아들이고 싶다. 주님이 그렇게 자신의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사명의 자리를 잃고 깨어나지 않는 그 시간 어린 아들을 위험한 지경에 노출시켜 출석한 이들에게 보여주면서까지 혹독하게 다루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매 새벽마다 세 가지로 여전히 주님께 묻고 있는 기도 중에 그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늘도 제단 앞에 무릎을 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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