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말씀’(Verba visibilia)인 성만찬
‘보이는 말씀’(Verba visibilia)인 성만찬
  • 정택은
  • 승인 2017.11.08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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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예배의식은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예배현장은 이런 예배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인간중심적인 예배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예배에 성실하게 참여하지 않는다고 걱정하고, 성도들은 성도들대로 예배에 참여해도 은혜가 없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피곤해지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요 영육간의 약한 것을 치유 받는 시간이요 잃었던 능력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예배에 감격이 없다? 최근 한국교회의 예배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예배에 더 이상 기대도 없고 감격도 없고 임재를 바라지도 않는 듯한 느낌이다. 한국교회가 모이기에 열심 있는 교회로 소문이 나있지만, 예배를 많이 드린다면 그만큼 삶에 본받을 만한 요소들이 많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예배는 있으나 하나님의 임재는 없고, 예배자는 있으나 감사와 기쁨은 없고, 하나님과의 만남은 추구하나 삶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결단을 갖는데 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예배는 인간의 응답은 전혀 무시하고 드림만이 강조되고 있다.

초기 기독교공동체의 모습은 부활의 감격과 그 기쁜 소식을 가지고 삐뚤어진 삶과 역사의 현장으로 나아가 부활의 증인으로 살았다. 그렇듯이 예배란 우리의 몸, 즉 생활 자체가 산 채로 하나님께 제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는 예배당 안에서의 예배로 끝나버리고 세상에서의 생활과는 전혀 관계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신앙과 생활, 예배와 생활은 이질이 아니라 동질이다. 예배당 안에서의 예배와 세상 속에서의 생활이 일치될 때 ‘거룩한 산제사’가 되는 것이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라”(빌1:27) 함은 크리스찬들이 현실적인 삶의 의미를 복음 안에서 찾아, 내일 죽는다 해도 오늘의 삶이 복음 정신에 위배되지 않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배와 생활을 결부시키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교회의 예배는 신학적인 재해석과 이에 따른 갱신의 요구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교회가 늘 새로워지려면 예배가 예배다워져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은혜 받는 방편을 허락해 주셨다. 그것은 말씀과 성례전이다. 예배에는 이 두 가지 요소가 균형 있게 자리를 잡아야 한다.

말씀 선포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올바른 나를 다시 세우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한 자신의 책임을 알고 그에 합당한 과업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공급받기도 한다. 반면 주의 만찬(성만찬)을 통해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생생하게 회상하고 속죄와 용서의 확증을 수립하게 된다. 나아가 성만찬은 주님과의 깊은 교제와 연합 위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바칠 힘을 공급해 준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만찬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이자 예배의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1년에 2-3번 내외로 성만찬을 진행하고 있다. 성만찬을 마치 하나의 형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웨슬리와 루터는 성례전에 대해 귀하게 그리고 자주 행해야 할 예전임을 주장했음에도 한국교회는 그 전통을 이어가지 않고 쯔빙글리의 전통을 이어받아 성례전 특히 성만찬에 있어서는 기념설에 따라 1년 한두 번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형식으로 취급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되는 것이요, 반성하고 갱신해야 할 부분이다.

또한 한국교회의 예배는 말씀과 성만찬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설교중심의 예배가 되어 균형을 잃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것은 초기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한국적인 예배의 신학이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그 예로 선교초기에 한국에서 복음을 전파하던 선교사들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성찬예식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한 나머지 세례자가 생긴 이후에도 25년 동안 성찬식을 행하지 않았었다.

선교초기부터 설교가 예배의 중심부에 자리 잡게 됨으로써 다른 예배요소들은 설교 보조역할이 되어 버렸다. 초대교회는 성만찬 의식을 예배의 한 요소로 설교나 찬송을 뺄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생각하였다. 종교개혁자들도 예배에 있어서 설교와 성만찬을 조화함으로써 초대 사도시대의 전통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성례전 예배에 있어서 말씀과 성례전의 균형을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성만찬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인간을 위하여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찬양하며, 장차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모든 역사에 대하여 감사로 응답하는 것이다. 성만찬은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바치신 희생을 통하여 지금도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시는 효과적인 표징이다. 이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한 회상, 그분이 이루신 구속의 현재화, 그리고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기대가 성만찬에서 입체적으로 실현된다. 따라서 성만찬은 단지 과거의 기념행위가 아니라, 현재 참여하는 모든 성도에게 그리스도의 희생을 재현하는 기념행위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에 연합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성만찬은 그리스도인들의 친교를 목적으로 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성도의 교제를 이룬다. 여기서 친교란 그리스도와 하나 됨, 서로 간에 하나 됨, 그리고 세상을 향한 사역에 서로 하나 됨을 의미한다. 아울러 성만찬은 미래의 메시아 만찬에 대한 소망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성만찬은 하나님의 통치를 대망하며, 하나님 나라에서 있게 될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이것은 성만찬의 종말론적 의미로서 마지막 때에 천국잔치에 참여하여 누리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예시하는 것이다.

성만찬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표적이며, 그리스도의 몸과의 연합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성도는 주의 몸을 분별하고 자기를 살핀 후에 성만찬에 참여하여야 한다(고전11:28-29). 그리하면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우리가 하여야 할 것은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직접 제정하시고 분부하신 그 말씀대로 성만찬을 행하였던 초대교회의 전통에로 회복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열심을 다해 올바른 교육을 교회 안에서 감당했던 것처럼, 이 시대의 목회자들도 성만찬에 대한 올바른 교육을 교회 안에서 시행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 성만찬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성만찬예전이 삶 속에서의 예전이 되도록 가르치고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성만찬이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질 때 성만찬 예전은 비로써 상징이거나 기념이 아닌 본질적인 실재로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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