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끝은 목사이고 십자가이다.
목사의 끝은 목사이고 십자가이다.
  • 민돈원
  • 승인 2017.10.21 1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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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나 강단에 무릎을 꿇을 때나 아니면 성도들과 목회자들을 만날 때마다 내 생각을 떠나지 않는 줄기찬 고민과 과제가 있다. 그것은 이런 것들이다. 목사인 내게 맡겨진 목회의 현장과 내가 바라보는 그 실태, 성도들이 생각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 그런가 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비춰지고 있는 교회의 실상은 어떨까? 이다

아마도 분명히 보는 관점에서 다 각기 다른 평가가 내려질 것 같다. 다만 성도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교회,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교회는 여기서 차치하더라도 우선 목사인 내가 목회하는 교인들을 볼 때, 또한 목회자들의 이런 저런 모임이라고 해서 참석하여 나누는 대화나 느낌, 그리고 한국 교회 전체적인 교회의 정서나 분위기 등을 진단해 본다면 애석하게도 힘과 기쁨과 소망을 가질 수 있다고 보기에는 감히 말하기가 힘든 것 같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기대하여 가깝게 사귀고 만나던 중에 어느 순간 점점 실망스럽게 되고 신뢰가 떨어지면 당연히 멀어지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처럼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가까이 하다 보니 받은 은혜가 크고 매시간 들려지는 말씀이 구구절절이 꿀 송이 같고 꿈이 커지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쥘 때도 있게 되었다. 또한 주일이면 오전 오후 두 번씩 어린이들 가르치는 일이 보람과 재미가 있었고 사명이 달아오를 때는 마음에 감동을 주체할 길이 없어 더 이상 이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된 나머지 음식을 폐하고 작정하면서 나는 어느 날 하나님의 강력한 붙드심을 못 이겨 오늘의 목회자가 되었던 지난날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일은 계속 이어졌고 식을 줄을 몰랐다. 신학교 갓 들어가서부터 나는 서울에 있는 한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하기 시작했다. 교회 2평쯤 되 보인 쪽방에 자면서도 이튿날 새벽기도 인도하라는 담임목사님의 요청이 나에게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아도 내가 부족한 것에 대한 두려움과 꺼림은 있었을지 모르나 그 요청이 왠지 싫지가 않았고 도리어 나를 인정하고 맡겨 주시는 목사님에 대해 고마움과 말씀 준비하는 일이 힘들었지만 즐거웠다. 그 이후로도 당시 담임목사님이 한 달 이상 외국에 체류 중일 때 주일 낮과 수요일을 나에게 맡기심으로 인도한 기억이 있다. 주어진 환경을 감사하고 미래의 더 나은 나를 훈련시키시는 섭리 속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더러 새벽기도가 힘들다고 하지만 그리 힘들지가 않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 나를 위해서라도 그렇다. 왜냐하면 이런 훈련이 안 되는 날 나도 예외 없이 그 자리가 주어지는 날에 세간에 조롱거리가 되고 여지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을 못내 떨쳐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회연수가 깊어질수록 초기에 가진 이런 애틋한 감동과 열정이 식어져 가는듯하니 이것만큼 내게는 괴롭고 힘든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러한 것들 중의 하나가 교회만은 세상과 달라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면서도 여전히 제도권속에 팽배하게 기정사실화 되어있는 자리다툼과 감투, 그로인한 금권선거로 멍들고 상한마음이 내게도 무관심하지 않게 밀려오기 때문이다.

흔히들 감리교회를 감독정치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기독교 인터넷 사이트인 ‘뉴스 앤 조이’에 금권선거 의혹에 관한 기사를 읽다보니 이에 대해 당시 감독회장 선거 캠프에서 활동한 A 장로가  "...<중략> 감독회장은 감리회 대통령이다...>"(2017.10.20.)라고 한 대목을 보았다. 그래서일까? 그보다는 못하더라도 감리회 1만 여명의 교역자들 중에서 불과 0.1%에 해당하는 극소수 특권을 가진 10명에 해당하는 2년 임기의 감독정도, 아니면 역시 3%정도의 특권을 지닌 약300여명에 가까운 우리 끼리 스스로 붙인 감리교회 꽃이라고 여기는 1-2년 임기의 최소한 감리사정도는 거쳐야 그래도 감리회 제도권에서는 명함을 내밀수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자. 감독회장이 감리회 대통령이라면 감독은 그렇다면 세상에서 국무위원쯤 되겠는가? 그리고 감리사는 시장, 군수에 비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프레임을 가진 구조를 극복하지 않는 한 문제는 요원(遙遠)하다. 마땅히 십자가라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혼란스러울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성경에도 십자가 지신 예수님 현장에 제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주님 대신 십자가 지고 갔기에 이를 위해 투표한 일 없고, 추대한 일도 없고, 더욱이 서로 지겠다고 한 장면이 없다. 그런데도 그렇지 않으니 감독회장이 십자가가 아니고 선거 참모의 말대로 대통령이 맞는지도 모른다.

내가 기대하고 기도하는 감리회를 비롯한 한국교회 모습은 이 모든 감투가 더 이상 자기 영광이 아닌 십자가가 분명하다고 하면 서로 맡지 않으려다가 떠밀려서 지고 가는 구레네 시몬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목사는 그 자리에 여전히 있지만 감투는 잠깐하다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목사의 끝은 목사이고 십자가가 아닐까? 이것이 목사인 내가 목회할 이유이고 적어도 누구든 목회자가 되려고 했던 초심이었을 때 바라는 교회 상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성도들이 원하는 교회일 것이고 그리고 세상이 교회를 향해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대치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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