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신학교육의 미래
감리교 신학교육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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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0.19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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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대안포럼 이상윤 목사 발제물

이상윤 목사(KMC전략연구소 소장)

1. 미래정책의 필요성

과거 없는 현재 없고 미래 없는 현재도 없습니다. 과거사진실위원회가 미래정권의 정통성을 가리듯이 오늘 감리교의 미래 감신대의 미래시제는 오늘의 선택과 집중으로 결정됩니다. 벌집에 여왕봉이 없으면 죽어버리듯이 감리교 정치판의 계보는 감독후보가 없이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고로 오랜 옛날 복음동지회에서 크고 자란 저는 송학 김지길 감독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다만 구리에서 개척하고 경기연회에서 크는 바람에 목원대 계보로 들어가서 감독을 3명이나 내면서 살아서 송학 김지길 김준영 목사와의 관계가 힘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시간 감리교 정책개발운동에 함께 하는 송학대안포럼 두 번째 모임에 초대받게 된 것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 저에게 맡겨진 주제는 감리교 신학교육의 미래입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사태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감리교목사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는 것 같아 그 기준에 맞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감리교 계통 신학대학교는 현재 3개가 있고 인천성서학원을 포함하여 연회운영 신학원들도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예단해 보라는 것으로 이해하여 여기에 섰습니다.
감신대는 과거에도 그렇지만 한국교회의 주류신학교 가운데 하나로서 평양신학교의 보수성에 대항하는 진보적인 기독교문명론을 신봉하는 감리교회의 목사 신학자를 배출한 학교로서 유명합니다. 처음에는 존스 성경학원장이 시무하면서 시작했지만 1907년부터는 정식으로 신입생을 받아서 시작한 교파신학교로서 30년대 아빙돈 주석서 출판으로 한국교회내의 진보신학의 자리를 차지하고 일제의 간악한 기독교 박멸정책에 희생되어 강제 폐교를 당하고 해방 후 1946년에 감리교 재건파 주도로 개교하게 되었습니다. 일제하에 일본 청산학원과 드류대, 관서대, 동지사대에서 수학한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포진한 감신대는 60년대 홍현설의 민족복음화운동에 균형을 맞추면서 한국 민중신학의 선조를 이루는 상황화 신학방법론으로 토착화론을 진전시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토착화론에 결정적인 결함인 역사의식이 포함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장측의 에큐메니칼 신학이 도전하여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일으키고 민중신학을 소개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립니다. 그러나 감신대는 문화신학적 아젠다를 가지고 좌파신학에 대안적 신학으로 맞서면서 현대 한국신학 형성에 빼놓을 수 없는 고전적 연구들인 유교 불교 풍류의 토착화신학을 토해 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미국신학의 압도적인 영향으로 형성된 해석학적 모방에 불과하였고 훗날 변선환의 신학적 도전은 아시아라는 본유의 문화정체성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대화의 신학으로 수렴됩니다. 그렇지만 이 역시 탈식민지화 이론이 해방의 프락시스로 융합된 것이 아닌 채로 종교다원주의 논쟁에 휘말리고 맙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훗날 해방의 프락시스를 잘못 판단한 후학들이 나와서 여전히 감신대의 해석학적 주도권은 세워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감신대의 학문의 노선과 정체성의 한계가 1992년 비극적인 종교재판이 벌어집니다. 최병헌으로 시작하여 감신대 조직신학은 토착화 신학운동을 일으킨 거물들이 많았던 학교였습니다. 그러나 감리교는 유신체제하에 민주화운동에 역행하는 호헌신파가 들어서면서 영욕의 세월을 살게 되었고 인혁당 8인의 사형수를 지지하던 조지 오글이 강제 출국을 당하면서 미국교회의 선교비가 절삭당하고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교단은 에큐메니칼한데 사람들은 떨어지는 감리교가 되면서 기장 예장 통합측에 밀리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5천 교회 100만신도 운동으로 복음전도가 신학적 전통에 성가시게 되고 복음주의 오순절 성령운동의 진입으로 교단 성향이 바뀌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복음주의 오순절 성령은사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삼파전을 벌리면서 기복신앙과 사회참여 정치신학이 대립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감리교의 정체성이 달라지기 시작한 70년대 후반부터 감리교는 복음전도와 성장주의가 지배하는 보수적인 경건주의 교회가 됩니다. 1300개 교회가 6400개 교회로 바뀌면서 체질이 달라져 실천신학적 요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밖에 구원있다 하고 불타와 예수를 논하고 부활메시지를 다시 조명한다고 하는 감신대를 공격한 것은 대형교회 형제의 난을 피하려는 비열한 책동이 개입하여 진보적인 학풍을 고수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쓰나미를 경고하고 종교다원주의 허리케인을 주의 주던 예언자적 신학자 둘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전대미문의 감리교 종교재판은 이후에 감신대의 비겁한 처세철학을 부추겼고 현실에 영합해야만 살아남는다는 위기의식에서 감신대의 자존심은 뭉개지고 말았습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신학교는 총리원과 함께 감리교의 얼굴이었는데 대형교회들이 성장하면서 위세에 눌리면서 신학적 자유를 유보당하고 교회권력이 지배하는 일반적인 신학교 범주에 들어가는 수모를 당한 것입니다. 분명히 토착신학자인 최병헌 목사를 포함하여 윤성범 유동식 교수를 위시한 김광식 박사와 박종천 교수까지 토착화 신학 세대들이 활동해온 감리교 신학대학교였지만 교파신학에 매몰되고 에큐메니칼 지평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교파신학의 주요 요소들이 복음주의 전도신학 정도이고 교단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체제들은 안정희구를 추구하면서 중도 보수화되고 실용주의로 안주하고 하면서 신학의 역할을 축소 지향적으로 전락하고 정치가 지배하는 분쟁사태를 겪고 있습니다. 사상의 좌표가 상실되고 현실분석의 힘이 평가절하를 당하면서 돈질하는 정치로 헤게모니 쟁탈전에 매몰되고 있습니다. 신학교육도 도매금으로 넘어가서 사상의 좌표나 신학적 성찰보다는 얌전한 학자들이 주는 먹이만 먹고 자라서 취업한 배경을 가지고는 대학을 어쩔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교단 내 신학교인 서울감리교신학대학교와 대전 목원대학교 신학대학과 봉담의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이 있습니다만 다원화된 상황에서 복음의 공동 증거는 협력하지만 특화된 신학적 과제에는 등을 돌리고 각자도생이라는 구조 속에서 신학교육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학교별 특성은 둘째 치고 사상적 고뇌와 복음의 프락시스를 경험하지 않은 어떤 수입 신학과 날로 먹으려는 출세주의 신학만이 서로의 신학적 경향성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교회가 요구하는 대로 학문적 중도주의를 채택하고 감리교 교역자를 배출하고 신학자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종합대학교의 신과대학이나 기독교학과가 신학교육에 뛰어들어 교역자 양성만 하지 않고 우수학생을 유치하여 신학자로 키우는 가운데 오직 감리교신학대학교만 교역자도 양성하고 신학자도 양성하는 더블 타겟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동종교배 원칙이 암암리에 적용되어 신학자들을 자기 학교출신들로 채우려하는 경향 때문에 신학교 교육은 이종교배를 거부하고 자기학교 출신 신학자를 교수로 초빙합니다. 협성대도 이제는 감신대 출신을 안 받습니다. 그래서 타교 출신 교수들이 서러움을 당하고 중년에는 결국은 학교를 떠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이 다 이러한 영향 때문입니다. 교파 신학 출신과 동종교배 한 하향평준화 된 인력이 교수가 됩니다. 감신대도 여기에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한신 출신 김상길이도 천재 김영민이도 김준우도 강남순이도 여지없이 교수 임용에서 탈락 당했습니다. 신학적 자기 결정권이 없는 신학자들이 살아가는 토양에서 글로벌 신학은 불가능하고 교단도 아니요 개체교회도 아닌 어떤 신학을 가지고 사각지대에서 가르치는 신학만이 살아남기 쉬운 구조적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포스트모던 한 풍경입니다. 성세를 구가하던 60년대 세속화 신학자들이 퇴조하고 상황화 신학 곧 에큐메니칼 신학자도 사라진 마당에 포스트모던 신학자들이 서식하는 생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2. 포스트모던과 시대정신

특히 90년대부터 한국교회는 성장의 퇴조를 보였는데요. 그런 결과 기독교 계통 주간신문들이 하나같이 퇴조하여 지금은 교파신문인 기독공보 기독신문 기독교타임즈들이 주류로 진출하는 변화를 나타냅니다. 이처럼 연합신문들은 쇠퇴하고 교파신문들은 호황을 누리는 방향으로 변화됩니다. 그런가하면 대형교회들은 기독교 미디어 분야에 진출하여 국민일보를 포함하여 케이블 TV 시대를 열면서 CBS가 탈락하는 대신 감리교 소속의 CTS가 나오고 이어서 Good TV 와 CGN TV C TV가 대형교회의 투자로 기독교 미디어 붐이 일어납니다. 경영에는 고전하지만 편성에는 기독교 미디어가 돈의 흐름을 따라 선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군소교단보다는 중견교회들이 드세고 대형교회가 주름을 잡고 있습니다. 자금 동원력에서 앞서가는 대형교회가 90년대부터 교회를 사유화하고 세습이다 대물림이다 해서 기독교의 공공성을 해치면서 자본과 결탁한 형태를 띱니다.
신학교의 문제도 이와 같은 흐름과 무관치 않습니다. 아시아연합신학대학교가 대형교회의 지원을 받으려고 나서고 모금에 어려움을 겪던 신학교들도 앞 다투어 대자본을 쥐고 있는 대형교회의 지원을 받으려고 나섭니다. 이들이 교회의 공공성을 무시하면서 사적 영역으로 교회와 학교를 가져갑니다. 교단신학교인 감신대도 역시 중견교회 지도자들이 이사회를 장악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작은 모금보다는 목돈이 나오는 교회의 지원을 받으려는 행위는 신학교육의 미래도 맡기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보자면 신학교의 운명은 교회의 손에 달렸고 미래정책 또한 이사회의 판단과 구상에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세운 총장도 학외 인사라는 것도 그러한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고 학내의 분열이 삼분오열되는 것을 이용한 것이 불과합니다. 총장 선출을 격렬하게 반대할 사람이 자기 소속 교회 담임목사인 그를 반대하지 않고 있고 학부와 신학대학원도 이사회의 결정을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왕대일 교수를 지지하던 비상대책위가 구 이사회의 임시조치권 행사를 반대하지 않고 방조한 것도 바로 그렇습니다. 특히 운동권에서는 즉각적으로 임시조치권을 공격하면서 전용재 이사에게 회의 통고를 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대법원 판례를 인용하였지만 과연 누가 있어 이사에게 통고하지 않은 쟁송을 제기할 것이고 변호사 비용을 물어 주겠습니까? 행정절차상의 위법행위는 분명하다지만 불법행위를 판결로 이끌어내자면 어렵습니다.
감신대학교의 총장 문제는 지난 2012년에 같은 고교동문 후보들 3인이 대결하여 이변을 일으키면서 예상 밖의 후보가 되었는데 이번 것도 바로 역전의 묘수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만 고만한 정치력의 소유자들인 교수들에 비해 감독회장을 지내고 노회할 대로 노회한 구 이사회는 이사장직도 잡아채고 최헌영 이시장도 깔아뭉개면서 비대위 어깨를 짚고 담장을 넘어 간 것인데 학위나 하고 출세주의에 이기적인 인간들인 교수들이 전투력에서 밀린 겁니다. 그러니까 정치 환경에 적응을 못하는 실력에다 신학적으로도 강하지 못하니까 상하 좌우를 구분하기 어려운 실력으로 총장 선출 전에서 총추위의 개입도 못 막고 밀린 것입니다.
우선 신학적으로 우수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개성이 있고 교수단의 지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학교 풍토가 그렇지 못하다 보니까 현실출세주의 성향에 현실안주로 몸이 밴 타협주의 신학자들이 천하삼분지계로 나뉘어서 갈 바를 못 찾고 미로에 빠진 것입니다. 일부 에큐메니칼 성향의 교수들은 학교 때 운동을 하지 않아서 운동 감각이 없고 무능하기 때문에 애매한 학생들만 희생시킨 것입니다. 이러니 이사회가 요리하기 쉽게 구조가 짜여진 것도 이번 사태의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정치평론을 지향하는 저의 운신도 시대적인 배경과 결코 무관치 않습니다.
감리교신학의 정체성을 진보적으로 구별하겠지만 90년대 인천의 도시산업선교가 해체되면서 감리교에서는 진보 싹은 좌파로 이동하고 교회에서 성장하려는 중도적인 세력들은 바닥 공동체 경험을 외면하고 교회정치 한복판으로 나갔습니다. 대부분의 진보적인 신학생들은 미련 없이 감리교회를 떠났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바닥을 경험하지 못한 신세대들은 교회눈치를 보며 성장하고 꼼수정치를 몸으로 익히면서 성장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전투력이 떨어지고 겁이 많아서 기질적으로 센 사람이 아니고는 자기결정권을 눈치작전에 맡겨두는 성향으로 입신출세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성장의 과실이 넉넉하거나 풍성해진 조건도 작용하고 목사 아들들이 미국 유학 나가서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고 공부하는 경향도 나타나면서 개인적인 출세주의가 몸에 밴 처세철학이 되어 버렸고 감리교 신학교의 신학적 수준이 하향 평준화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연히 에큐메니칼 운동은 중간에 희석되면서 교파정치에 매몰하는 목사들이 늘어났고 대전 감신대 출신들이 감리교 에큐메니칼 운동을 석권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가장 핫한 것이 감신대의 자중지란, 바꿔서 말하자면 교단정치의 삼분오열로 나타나면서 후보 사태가 나고 단일화가 물 건너 간 것입니다. 우선 감신대 출신들은 잘 났지요 그리고 먹고 사는 줄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지요. 감신대 출신들끼리 합하지 못하고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게 된 것입니다. 이전까지 그러니까 90년대 이전까지는 그나마 계보정치가 이것의 일부를 감당해주었지만 감독후보를 내지 못하는 불임의 계보들이 쇄락하면서 자생적인 계보들이 중간에서 서식하면서 감리교 사태를 통하여 성격을 분명히 하고 글로벌 미션이다 동방선교회다 하면서 평신도 한마음회 처럼 전혀 엉뚱한 세력들이 감리교 정치의 한 귀퉁이에서 진출하였고 여기에 3개 신학대학교의 동문회와 대형교회의 동문 찾기 프로그램에 편승하여 21세기 감리교는 지금 계보정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교회정치의 권력 찾기 게임이론을 들어보겠습니다. 우선적으로 자금 줄이 분명하지 못하면 사람조직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성모 목사의 감독회장 선거무효를 구하는 재판에서도 민낯이 드러났지만 지난해 9월 27일 치룬 감독회장선거에서도 엄청난 자금이 풀어졌고 연회교회 사태를 통하여 선거조직에 뛰었던 모씨가 결국은 보조참가신청까지 하는 해프닝 끝에 내일재판의 결과를 보게 될 만큼 숨가쁘고 어려운 고빗 길에서 돈을 풀어서 사람을 조직하고 선거를 치룬 것입니다. 두 번째는 조직은 그렇다 치고 방만해진 교회 정치의 구조와 생리를 파악하지 않고 뛰어드는 감독회장 후보들은 되지도 못하게 만들어놓은 전략서를 가지고서는 땅 짚기도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것입니다. 지난번 선거에 쟁점이 되었던 아현교회 후보도 사전에 치밀한 준비와 조율을 거치지 않고 감독회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전략적 미비와 지지세력 규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고 말았습니다. 엉성한 전략서 하나 가지고 선거전에 뛰어든 게 잘못이지만 더 심각한 것은 정치하는 생리가 아닌 사람이 뒷전에서 부채질한다고 무턱대고 나오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이것이 비극이었습니다. 이번 총장사태에서도 드러났지만 미래는 고사하고 자기 확신도 없고 주변머리도 없는데 운칠기삼 하면서 우연찮게 출사표를 던지면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결국은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곁에 사람이 있어서 힘이 있는 게 아니고 글로벌시대의 감각적인 촉을 작동시키고 죽기 살기로 돈쓰고 사람 찾아다니는 불세출의 용기와 집념이 없으면 웃음거리가 된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지 않습니까?
감신대의 미래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미국식 교육 그만하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20세기를 주름잡던 리버럴한 신학교들이 주저앉고 재정 적자로 재산팔고 망하는 것처럼 한국에서도 어중간한 신학교들 교회가 외면하고 목회자들이 뒤돌아서면 그만이라는 교훈을 말하자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고 건축하고 하는 것은 목회자가 경영수완이 좋아서 한다고 오해하면 그게 기복이고 번영의 복음이라고 말하면 에큐메니칼 신학과 운동을 제대로 하든지 국제무대로 진출할 만큼 영어 잘하고 실력 있게 키우던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국제무대 진출하는 로지스틱스도 모르고 인맥도 없고 실력보다도 인간성 더러운데 누가 받아주고 키워준답니까? 그런 저런 이유로 감리교신학대학교는 지금 큰일 났습니다. 교수 정치꾼들이 학생 선동하여 이용하다가 자기는 살겠다고 진영을 바꾸고 성폭력으로 여학생 망가지게 해놓고도 무죄 받았다고 좋아하는 인간이 신학대학교 교수라면 뭐 하러 설교는 하고 뭘 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페미니즘 거부하고 동성애에 대하여 공격적인 신학하면서 같은 시대를 산다고 하면 공감 나눌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지금은 가만둘지 몰라도 그 다름 세대에서는 못삽니다. 혐오와 차별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투쟁하고 극복하는 인간들이 그냥 두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한국사회는 치열한 생존경쟁과 양극화된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3. 글로벌 상황과 감리교 정치

지금 글로벌 상황은 미국과 중국 간의 뜨거운 첩보전이 전개되고 있고 한반도 북단의 평양은 견고한 권력체제를 가지고 핵과 미사일을 확보한 북한의 공격적인 외교 공세로 나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응하는 미국의 전략은 과거 제네바 협상으로 형성된 통미봉남 전략을 쪼물락 쪼물락 거리면서 동시에 남한의 돈주머니에서 거액인 679조원이 북한으로 넘어갈까보아 셈을 하는 중에 있습니다. 결국은 성질 급하지만 실력이 뒤지는 남한이 옴팍 뒤집어 쓸 공산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좌향좌 정권이 들어서서 평화체제를 거들고 미군철수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한미공조가 흔들릴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 때는 휴전협상 테이블에 보조 참관인으로 나갔던 전력이 있고 전쟁 중에는 전시작전권을 환수당한 경험이 있는 남측으로서는 물러서는 게 이상하지 않지만 민족생존을 걸고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사일을 가지고 있는 북한은 죽기 살기로 대들기 때문에 남한측이 뒤집어쓸까 보아 걱정입니다. 실제로 전쟁 중에 일본육사 출신 재일동포 공주사람 유재흥 장군은 제 3군단 병력 7천을 잃고 도망간 것을 전시작전권 마저 빼앗은 이가 비로 미 8군 밴플리트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 후에는 패전지장인 유재흥 장군이 재기하여 국방장관도 지내고 총력안보중앙협의회 회장도 지냈으니 가관인 것입니다. 휴전회담중인 53년 5.23일 돌연히 북한측은 정전협정 대신 평화협정을 맺고 미군철수를 요구하고 나왔습니다. 지지부진하던 회담은 결국 중공군의 도움으로 7.27일 휴전협정을 맺었지만 휴전선 일대 4천Km에 달하는 지하터널을 만든 중국군과 북한 인민군은 어마어마한 크기로 터널을 뚫고 공격전의 선봉이 되려하였고 결국에는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한 것입니다. 언제라도 치고 나올 준비가 되어 있는 북한에 비하여 우리 군은 군기도 엉망이고 죽음으로서 조국을 지키겠다는 결기가 부족한 군대이고 똥별만 400개가 넘는 군대가 전시 작전권도 없는 주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 형편에 목사들의 정치놀음은 한심한 것입니다. 해방직후 국민 정서를 반영하는 미군정의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났지만 남한의 사회주의 세력은 자본주의 세력보다 3배나 많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지금 일본에는 중앙정보국요원이 100명이 있는데 이것은 국방성 현역 장군이 8군 정보처에 책임자로 있고 3백 명이 넘는 정보요원들이 암약중이라는 보도도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안보상황이 엄중한 가운데 대북 접촉도 의심받는 준전시하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국내외에서는 주전파가 주화파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지난 후 70년이 지났지만 남한의 일반 여론은 중도 좌입니다. 그것은 과거 해방정국에서도 나타났던 사회주의적 성향이 남한에 지배적이고 개중에는 공산주의자도 많다는 분석입니다. 저출산 고령화는 실제로 양극화로 인한 것인데 교회도 양극화되어 흙수저들이 목회하면서 당하는 처절한 비극은 여기에서 특별히 다뤄야 하는 주제입니다. 그만큼 심각한 부익부 빈익빈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미국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스마트폰 쓰고 은행카드 쓰고 자동차 렌트하고 하는 실력은 미국의 보통시민들보다 우리가 더 잘삽니다. 불편한 게 별로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모든 것이 몽땅 미국식이라는 겁니다. 내가 왜 감리교서 출세 못했는지 아세요? 저는 유학을 엉뚱하게 인디아로 갔고 역주행한 유학생활을 하였는데 비판이나 퉁퉁하면서 누구 앞에서도 겁 없이 나가니 날이 센 거지요. 장기천 목사도 김홍도 목사도 다 감독회장 된 이들인데 저는 그들 밑에서 부목사를 지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지도력이 금방 동나고 무너지면서 그들의 입맛에 들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사는 방식이 현격하게 다른 이들을 동행한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신학적 사고방식이 고루하고 자기류의 목회철학과 고집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맨 정신에 들어가 제자가 되고 대를 잇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글로벌 시대를 맞아서 지구해석학이 빈곤해진 신학계에서 박학다식하여 시대의 고뇌를 안고 주체적인 사상을 소유하고 좌우사상을 넘보던 실력으로 KMC전략연구소라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니까 감리교단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화위복이 아니고 절차탁마대기만성입니다. 어느 그늘에서 크기에는 애똥이가 세고 그렇다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굴하지 않고 고난의 길을 걸어 왔던 것입니다. 고생이 낙이었지요. 그리고 특유의 치고 빠지는 능력으로 대처하는 방식에서 앞서가는 법을 터득한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주제인 감리교 신학교육의 미래에 대한 소견을 밝혀 보려고 합니다. 부족한 저를 초대해주신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기대에 부응할 만한 내용을 제시할 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래정책은 과학입니다. 아니면 불충분한 요언 곧 예언이 아닌 혹세무민하는 요설이 되는 것입니다. 근거가 있고 내용이 충실해야겠지요. 그렇지 못하면 이판에서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국가나 사회에 대고 발언하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문제는 약간 차이가 납니다. 그것은 교회정치가 결정적 한방이 없다보니까 숙청당하는 것은 음으로 양으로 뚜렷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당에는 발목이 잡히겠지요. 요언은 위험하고 해독을 끼치고 해당자들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문제의식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저는 1978년 아현교회 감리교청년회 겨울수련회를 통하여 떴습니다. 그 후 장장 10년간 감리교 청년운동을 하면서 계보정치를 깠습니다. 논객이었고 운동을 계보정치 하듯이 세태를 거부하고 감리교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과 운동의 발전사를 쓰면서 살았습니다. 실제로 감신대 입학한 후 4월 달에 총리원 단식점거사건에 참여하면서 지금까지 감리교 본부 총리원을 들락거렸습니다. 당시 저는 김준영 총무의 자원봉사자로 만났습니다. 당시 아현교회 김지길 목사님을 만났고 5천교회 100만신도운동의 간사인 이종복 감독도 같이 동사하였습니다. 다행히 고향선배라서 들락거리는데 지장이 없었습니다. 김준영 선교국 총무 3선을 지켜본 후에 영국감리교 장학금을 타고 셀리옥 칼리지로 유학을 갔습니다. 당시 선교국은 전도국 체제를 폐지하고 하나님의 선교 정책에 맞는 선교국으로 거듭나던 시절이었습니다. 1976년부터 영국 감리교회 해외선교부로부터 다소간의 금액의 원조를 받아서 서울도시선교회를 꾸려서 빈민선교를 시작하였고 사당동에는 정명기 목사가 저와 김정택 전도사는 남대문지역과 다른 빈민지역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1988년 6월 인디아 연합신학대학으로 유학을 간 것은 WCC 오재식 선생의 추천으로 CCA 장학금을 타고 갔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감리교 장학금으로 학부 대학원을 하고 유학을 두 번이나 했습니다. 네덜란드 ICCE 원조금과 브레드퍼더 월드 자금이 일영 연수원 건설자금으로 왔고 안고아수 목사가 김준영 총무 횡령사건을 터드려서 고생 고생하면서 표용은 감독회장 때 겨우 공사를 마치게 된 것도 다 그 시절 이야기입니다.
지금 제가 몸담고 있는 감리교단의 역사와 현실을 자로 재듯이 진단하고 미래정책개발의 관점을 살려서 감리교 글로벌 시대의 경쟁력을 높이자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당연히 감신대학교의 과거 흐름에 정통하고 오늘의 현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압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제가 감리교역사학회의 첫 번째 서기를 지냈으니까요. 그러나 지나간 사료를 뒤적거리는 것 보다는 현장을 누비는 것이 낫겠다 싶어 도시빈민운동에서 농촌목회로 동대문교회와 금란교회를 거쳐 본부와 NCC와 WCC도 간 것입니다. 그동안 저의 관심은 영어 공부와 아시아에큐메니칼운동과 에큐메니칼 경륜을 키우는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수준이 중요하지요. 실력을 향상하고 인간관계의 폭을 넓히고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지냈습니다. 특히 아시아에서는 CCA를 통하여 활동하고 에큐메니칼 친구를 사귀고 현장분석을 하고 현안중심으로 공부하면서 스위스 제네바로 가서 WCC까지 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는 교파신학의 과제인 감리교 현대사를 정리하고 아시아 신학의 과제와 에큐메니칼 신학운동의 내용을 소개하고 해석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생명나눔과 감리교 선교활동을 정리하고 교단의 싱크탱크가 필요하여 정책학을 수립하고 특히 미래정책을 개발하자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동파 거두 히까리 김광우 목사님이 남겨준 1990년 나온 감리교 제도변천사를 뒤이어서 감리교 현대사에 나타난 교회권력의 정체와 정책과의 함수관계를 정리하여 감리교선교를 역사적 사회적 과제 중심으로 해석하는 일에 매진하려고 합니다. 공교롭게도 저는 경기연회에서 복음동지회 활동을 하면서 복음동지회 출신 목원대 목사 3명이 감독이 되도록 조력했습니다. 말년에 이들이 복음동지회 자격으로 기독교서회를 장악했는데 목원 둥문회로 바뀐 이들이 조직을 장악하는 바람에 감신 출신인 저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신학적 식견과 함께 복음의 열정을 간직하고 성령충만한 체험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신학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잘만하면 감리교에 싱크탱크를 설치하고 감리교 미래정책을 제시하고 후학들을 키우는데 까지 가지 않을까 기대됩니다.
2004년 신경하 감독회장이 취임하면서 만든 게 감리교 장단기발전위입니다. 거기에서 행정기획실의 기초를 다지게 되고 조직적으로 보강되면서 오늘날 감리교 본부의 교권을 강화하는 기초가 됩니다. 이것이 실질적인 강북파의 산실이 되어 감리교 교권을 먹었던 것입니다. 목원대도 40주년 기념사업을 하면서 이유식 감독회장 체제를 구축하는 기초를 닦았고 근자에도 전명구 감독회장이 40주년 준비위를 가동하여 박민용 총장과 합을 맞추어서 감리교 수장자리로 왔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호흡이 짧고 들어간 돈을 되찾으려고 몸부림치면서 측근들을 놓치는 불상사가 연이어 터지는 중입니다. 호흡이 짧으면 팔자려니 해야 합니다. 속이 좁고 성정이 작아서 큰일을 도모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래도 김지길 감독님은 성정이 그렇고 그런 김준영 총무와 끝까지 함께 했습니다. 대단하지요. 오늘도 이 자리는 그런 인연으로 맺어진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만 남아도 조직은 삽니다. 미래란 오늘의 연장에 불과하고 신의와 성실의 끝판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도래할 미래를 구조적으로 파악하고 분석하는 과제는 역시 학자적인 소양과 예언자적인 통찰과 헌신성이 있어야 하지만 인간 대 인간관계는 깊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책임이 결판을 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도움을 구하면 겸손하여 상을 받는 것입니다. 김지길 감독 밑에서 일했지만 그러한 정치구조를 파악하지 못한 한 사람은 끝까지 어깃장을 부리다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아닙니다. 과제 중심으로 조직을 관리한 보스들은 내가 오히려 거북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카리스마가 다른 카리스마를 보지 못하는 법이거든요. 연구는 선제적 대응방식을 찾는 노력이고 그렇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현실을 파악하고 분석하고 머릴 굴려야 합니다. 최근에 호헌파 물락 이후 연세대 출신으로 감리교 정치의 리베로가 한명 태어났습니다. 인물도 훤칠하고 속을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약간 무시를 하지만 집안이 좋고 건실하고 인내심도 강해서 연수원에 사람도 집어넣고 하면서 약진하고 있는 감리교 인사가 있습니다. 언론자유를 행사하는 과감한 행동도 보입니다.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강한 설득력은 오히려 반감을 사듯이 저의 오늘 발언은 포럼을 넘어서서 파장이 예고됩니다. 다만 있다면 저의 제안은 선거철에만 반짝하는 연구를 그만두고 상설로 활동하는 기구를 설치하여 장단기적인 연구과제를 가지고 활동을 하자는 것입니다. 감리교 목사 1만 1027명에 장로 1만 5천명입니다. 정치는 한다고 하면서도 싱크탱크 하나 운영 못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나서서 호소하고 탁 까발리는 것입니다. 글로벌 시대에 목회와 선교의 경쟁력을 키우고 여기에 더하여 정치운세에 흔들리지 않는 미래를 품는 여러 연구들을 집중적으로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들리는 말로는 광화문연구소(가칭)도 움직인다 하니 생각들 해보시기 바랍니다. 제 주변은 에큐메니칼운동 하던 이들과 신학자들이 있는데 하나같이 관학파들이라 놔서 야전에 약하고 조직경험이 전무하여 내용적으로 빈약합니다. 저는 판단하기를 감리교 미래를 보려면 지난 감리교사태 8년을 관통하여 인물 중에 하나인 신기식목사를 주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해적이를 들추면서 들입다 파고들면서 감리교 정치의 내막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언하건대 신기식이를 모르면 감리교 미래를 모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고소장에서부터 판결문 사례 들을 집대성하고 역사의 현장에서 경험하고 느낀 소회를 이해하게 되면 감리교 과거를 직통하는 오늘을 가지고 미래를 관통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지금도 재판에 필수불가결인 고소장 하나는 기막히게 잘 씁니다. 한 때 안광수 목사도 악명을 떨쳤지만 그는 얕은 수이고 이 사람은 돈보다는 목적이 이끄는 대로 나가는 존재이다 보니까 병기 같은 존재입니다. 지금은 2년 정직을 당하여 내년 6월까지 활동이 금지되었지만 다시 활동 할 것입니다. 지금도 개인적으로 자서전 한편을 썼고 재판사에 정통하니 교리장정연구 안내서를 저와 공동으로 집필하였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정장개정위에 제안한 내용 중에 교리장정연구단(전용철 목사)이 제안한 것에는 감독회장 임기를 2년 겸임제로 바꾸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개정된다면 지금의 감독후보들이 모두 일어나서 감리교 정치지형을 바꾸게 됩니다. 그리고는 3번째로 세습행위 근절을 하는 입법도 나올 것입니다. 감리교 수장 8명을 8년 동안 갈아 쳤는데 법원의 판결문 하나로 자리를 날렸던 것입니다. 앞으로 저의 연구소 활동은 감리교 미래정책개발과 인재등용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모쪼록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지속적인 연구활동을 하여 상시 체제를 갖추고 나가려고 합니다. 먼저 연구소 싱크탱크의 역할은 이광재의 여시제 같은 건전한 여론 형성과 대안연구로 대별됩니다. 이어서 차세대 인재들을 육성하여 연구집단화 시키고 대화와 협상이 중요한 무기임을 깨우쳐주려고 합니다. 평화운동의 기초는 대화와 협상입니다. 북핵 협상도 결국은 대화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행위에 불과 합니다. 앞으로 신학적 성찰과 역사적 반성을 매개로 하는 감리교 신학의 정체성과 선교전략을 수립하여 미래감리교 정책의 로드맵을 해쳐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이를 위하여 복음주의 오순절 에큐메니칼 신학과 선교를 아우르고 그리스도 중심 복음주의 노선에 서서 교회를 살리고 하나님의 선교의 사명을 위한 사회변혁적인 과제를 수행하는 예언자적인 비전을 채워가자는 것입니다. 돈이면 다되는 세상에 돈보다 믿음이, 영적인 감화와 감동이 더욱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대안 찾기에만 매달리면 단발성으로 끝내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공부하고 단련 받는 노력을 통하여서 지속가능한 고도의 전문적인 연구기능을 갖춘다면 교파연구소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도 있습니다.

4. 감리교 신학교육의 과제와 전망

지금은 한국교회에서 신학교육은 대체적으로 종합대학교 안에 신과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신학을 가르치는 것이 있고 다른 것은 특정교단에 속하여 교역자양성기관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학이 교회를 위한 것인 만큼 목회자를 양성하고 교회를 위한 신학자를 양성하는 것이 본령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못하겠다는 학교가 있습니다. 그런 곳이 분쟁중입니다. 한때 해외선교자금이 들어오던 시절에는 에큐메니칼 신학기관이 뜨고 자립대책이 없던 원주민 교회들은 손만 빨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WCC가 최고인줄 알고 그렇게 했습니다만 이제는 원조는 없어지고 WCC는 국제적인 위상을 지키려고 에큐메니칼 외교구락부가 되었습니다. 전위적인 도시산업선교가 사라지고 민초들의 피맺힌 소릴 외면하면서 세계선교를 성령역사로 받으면서 겨우 변혁적 제자도를 전파하려는 것은 호랑이 없는 골짜기에 토끼가 스승노릇을 하려는 겁니다. 이슈에 민감하여 교파신학보다는 초교파적인 신학교육을 하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현실에 주저앉아 있던 원주민 교회가 부유해지고 원조를 받던 교회가 원조를 주는 교회로 변했습니다. 2만 8천명의 한국 국적의 선교사는 말이 2만 8천이지 모두가 대단합니다. 한국선교를 오죽했으면 돈질 선교냐고 하겠습니까? 교단본부가 힘을 잃었고 개체교회가 강대해진 시대입니다. 개체교회 담임목사가 해외선교 지휘자이고 결재자입니다. 교파신학이 뜨고 독립신학교들이 번성하고 있습니다. 신학교는 특성상 대학과 신학교라는 특이한 두 개의 법적기관이 양립하는 조직이고 교단의 최고지도자들이 집착하는 기관입니다. 오죽하면 장로교는 총회와 신학교를 잡으면 다 잡는다고 하겠습니까? 어느 순진한 기자가 교단 목회자들이 신학교 이사회를 장악하려는가? 하는 기사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의 정치 목사들의 정치무대인 법인 이사 진출입니다. 선교 초기에는 신학교는 교회교역자들을 키우는 요람에 불과하였고 자원봉사 하는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대학도 엄청 커지고 이권도 대우도 남다릅니다. 학문보다는 일선교회의 목회보다는 고급진 보직이고 교회를 지배한다는 자부심도 느낄 만 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신자유주의 정부 통제하에 들어간 학교는 제반 학교기능 요건을 만족시켜야 하는 평가활동에 숨 막혀 있고 세금을 내는 교회들은 정부의 통제하에 바벨론 포로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세금 과표를 들이 밀면 꼼짝도 못하고 목사들은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자연 대학교육에 준하는 엄격한 교육평가 제도가 가동되고 있고 각종 인증제도와 행정규제에 묶여 있습니다. 인사는 고사하고 재정 관리와 행정비용도 엄청 납니다. 그것을 총장혼자서 다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오죽하면 올꾼이 변선환 선생도 88년에 학장을 하려고 하니 인생의 친구 이고 후배인장기천 감독이 왜하려느냐고 다그쳐 묻습니다. 그때 하신 말씀이 사내로 태어나서 그런 야망도 없겠느냐고 승수했다고 합니다. 잠자듯 공부만 하던 행정의 문외한이 학장을 하셨고 독재했다는 불평불만을 들었습니다. 이사회의 양해로 교원인사권을 할양 받아 독재를 했습니다. 이처럼 교단의 지배를 거부하자는 것이 지금의 신학교 입장이고 태도입니다. 이러한 이권을 놓고 대립하고 갈등하는 관계에 빠지는 경우가 신학교의 현실입니다.
지난 2012년 총장으로 취임할 때 125년 감신 역사를 뒤집을 기세로 나왔던 박종천 박사도 행정에 몰입하고 정치에 맛들이면서 국제 캠퍼스 개발은 고사하고 자신의 국제활동의 주 무대인 WMC 정책도 제대로 진전시키지 못하고 분쟁으로 영욕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나마 국제 프로그램은 김외식 총장 때 세운 것이고 AMC가 채택하여 동아시아로 유학 오려는 남아시아 신학생들을 받은 것뿐입니다. 개체교회가 돈을 대주었기에 실제로 학교가 주도한 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저출산의 영향으로 학생 수가 대폭줄고 있습니다. 이제 학교 생존전략이 필요한 때입니다. 특히 교단이 요구하는 교역자수급 원칙을 준수하면서 통합신학대학원의 실현을 위하여 공동전선을 펴야 합니다. 더군다나 학교 간 경쟁도 치열하고 학교운영에 따른 수많은 민원과 법률구조라는 애로점이 부각되는 시절입니다. 튼튼한 인맥 없이는 신학교 총장도 어렵고 고위직을 알고 소통하는 능력이 없으면 교육부의 압력을 이길 재간이 없습니다. 지난번 2013년 감신대 동문회(총동문회장 김영진목사)가 주최한 세미나에서도 나왔지만 문제점은 학교측에 있습니다. 정신들 차려야 합니다. 전 덕성여대 이사장까지 지낸 박경양 목사는 당시 감신대 이성민 교수가 발제한 내용 중에 부적절한 부분을 지적했습니다. 이성민 교수가 하는 말이 1) 감신대 교육의 질이 우수하고 2) 감신대 학생이 목회에 대한 헌신성이 뛰어나며 3) 타신학교에 비하여 국제화가 용이하다는 등의 주장을 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도 시원찮은 판에 그런 발언을 그것도 발제에서 했으니 참 한심합니다. 세상 물정도 모르고 사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금도 대체적으로 신학교를 교회를 위한 교역자 양성학교 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면서 자기는 목회 현장에서 고생 안하던 것을 위안 삼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중에 백미는 변선환 선생입니다. 교단이 고속성장하고 있는 것을 이해 못한 그는 고집스럽게 신학교는 신학자를 배출하는 곳이라고 소리를 높였는데 한심한 주장이었습니다. 누군들 편안한 삶이 보장되는 교수 안 하고 싶습니까? 빈곤가정 출신으로 운 좋게도 교수 눈에 들어 미국가고 독일가고 싶지만 현실은 팍팍해서 공부의 꿈을 접은 신학생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면서 가짜 귀족으로 행세하는 교수들이 교회권력이 학교를 지배한다는 볼 맨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신학교 교수와 교회 권력 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심도 작용하고 불신의 싹도 보이는 것입니다.
최근 감신대 사태가 악화되는 배경에는 세상물정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이 책상머리에서나 생각할 만한 것들을 불쑥불쑥 내뱉으면서 악화되었습니다. 물론 조경철 교수가 이사장은 학생을 교인으로 취급하고 교수를 부목사 정도로 알고 있지 않느냐고 했는데 사실 맞는 말입니다. 그게 사단이 난 이유였습니다. 이사장은 성공한 목회자요 교단의 장을 지냈으니 당연히 군림하려고 들었습니다. 교권의 정상에 오른 사람이 진정 권위는 겸손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나 정치하는 스타일에서 그런 인상을 받은 것입니다. 이사장은 담임목사이고 학생은 교인이고 신학교 교수는 학자의 인격 대우를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교회와 신학교간의 상호불신을 조장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에 학문의 자유는 글로벌 시대의 경쟁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현실을 견적내고 덤벼드는 용기와 다원화된 사회를 이겨내는 신학적 노력이 없으면 돈 번 놈이 행세하려고 드는 이사회와 신학교 당국자 사이에는 총성 없는 심리전이 벌어지고 갈등하게 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신학교도 교단 신학교로서의 자기정체성을 가지고 자기도 목사로서 기독교 대한 감리회 소속 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저간의 사정인 것 같습니다. 지금 현실로 말하자면 신학대학교는 전적으로 교회의 지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의식이 팽배하고 교회는 재제와 간섭을 하겠다는 것으로 양분되어 있습니다. 이유식 감독회장 재직 시에 각 대학별로 총회가 재정지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요즘에도 총회에서 각 신학대학교에 재정지원을 하게 되면서 교회와 신학대학간의 교류가 실감나고 있지만 감신대 같은 경우는 지난 1992년 종교재판으로 학문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대형교회 근본주의에 치명타를 입는 바람에 사실은 관계가 조심스럽고 어렵습니다. 단순히 재정지원만 받는 관계는 아니고 졸업생 동문들이 이사로 참여하고 교권의 지배를 받다보니까 갈등과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요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근자에 발생한 신학교 총장 선출을 둘러싼 분쟁은 이러한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교회가 기대하고 요구하는 신학대학교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미래 세대를 육성하고 과거를 공유하는 신학대학교는 신학이 교회보다는 학문의 자유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문제이고 그렇다고 신학교육 담당자에게 학문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양 기관 간에는 정책공조와 협력과 대화의 장을 놓고 대화하고 수렴하려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학대학교의 학문적 자유를 고유한 것으로 인정하고 교단소속으로서 학문연구의 연대성을 담보하는 마음을 갖자는 것인데 서로 간에 이해부족과 갈등요인을 중재하지 못하는 치열한 갈등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분명히 법적으로는 신학대학교는 교육부 산하의 교육 법인이고 이름도 감리교 신학원입니다. 그것은 신학대학교가 교단의 위임을 받아서 감리교회를 위한 교역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 맞습니다. 신학대학교가 학부와 신학대학원을 운영하고 있고 졸업생들은 감리교회 목회와 선교현장으로 파송되어 나갑니다. 중요한 것은 신학적 실천을 통한 통합적인 리더쉽이 필요한데 따른 상호이익관계가 소통의 동기가 되고 신학협동 프로젝트를 실행하여 와싱톤 디씨의 웨슬리신학교가 한국동문을 사로잡았듯이 적극적으로 이익을 제공하고 서로간의 상생구조를 짜야만 한다는 교훈을 왜 피해서 가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드류신학교도 급하니까 그렇게 하고 시카고신학교도 한국신학연구센터를 세우고 심지어는 동양선교교회의 백만달러기금으로 옥성득 교수가 UC 버클리에 한국교회사 교수가된 것도 다 있는데 감신대는 아무것도 안 하고 동종교배로 죽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5. 신학대학교와 교단

이번 총장 선출을 둘러싸고 벌어진 총추위의 역할은 단연 돋보인 바가 있습니다. 물론 당한 사람은 천추의 한이 되었겠지만 총장선출방식이 개선된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탈락한 후보는 법인 상대로 가처분 소송을 시작하였고 지금은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사회는 신학교를 지배하는 세력이 교수들이라고 비판하고 교수들은 교단의 지배를 간섭이라고 대들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이사장이 월급주고 교단의 위임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김영진 이사의 경우 이사로 취임하던 초반에 이렇게 기선을 잡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9인 이사회와의 대립각을 세우다 보니까 이사장측과 연합하여 교수들과 대화해보니 총장 하겠다는 권력욕이 대단하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아주 아쉽습니다. 무술 중에도 태권도는 급소를 찌르고 합기도는 공격보다는 방어에 능한 호신술로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듯이 교회의 정치도 결국은 노회하고 믿음이 있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정치는 특히 정책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고 고수급은 정치보다는 인간이해를 바탕으로 상대를 감화시키는 능력으로 정치를 하는 것이라면 일부 미련한 정치 동문들의 결탁이라는 인식을 불식시키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교착상태에 빠진 감신대의 총장선출사태는 올봄 비상대책위원회라는 임의단체가 등장하면서 점입가경이 됩니다. 이른바 감신대 운동권이 개입한 조직이 비대위라면 신경하 감독회장이 위원장이 된 것은 그것의 결과입니다. 이들은 기왕에 시작한 뜻이 이사회를 압박하고 견제하여 학교 정상화를 이루자는 것이었는데 초기에만 반짝 사람들을 만나고 하더니 조용히 있다가 천하삼분지계를 이룬 것을 이용하여 마지막에 이사회의 임시조치권 행사에 엮이면서 엉뚱하게도 학외인사를 총장 선출하는 구도로 치고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유감스럽게도 일 년 간이나 고생한 총장 대행은 논문 표절로 구설수에 올라버렸습니다. 이번 10월 10일 구 이사회의 임시조치권 행사로 17개월 끌었던 총장선임을 한 번에 해결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당선된 총장이 추천한 3명의 이사도 선임하였습니다. 앞으로 학내는 반대여론으로 후폭풍이 불어올 테지만 구이사회를 대신하는 신인이사진을 놓고 볼 때 여전히 허점이 많이 남습니다. 왕대일 교수의 지지경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구이사회의 꼼수정치에 대항하는 이러한 경향은 합법성을 놓고 법정으로 가듯이 내부문제는 언제라도 재연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보입니다. 만약에 총장선출에 대한 불만이 세력화한다면 제 2의 분쟁이 다시 도질지도 모릅니다.
신학교육의 미래정책은 과연 있는가? 있다면 통합신학대학원 말고 캠퍼스이전 문제가 불거진 1992년 가을로 돌아가 보면 결국은 구덕관 초대 총장 체제가 물러나고 새로운 총장이 들어왔고 냉천동에다 채플 짓고 종합관 짓고 하면서 수면 아래로 내려갔던 것인데 이것이 미래정책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면 어떤 행태로 논의가 이어졌는지 추적해야 할 것입니다. 혐오와 차별의 시대에 여성 평등 문제는 감신대 분쟁의 핵심뇌관이었는데 이처럼 가부장적인 이사회가 군림하면서 수면 아래로 내려간 여성 세력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남성우위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교회정치에서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양성평등문제는 날로 비중이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감리교도 예외가 아니어서 교회의 양성평등 이슈와 함께 동성애 문제와 무슬림포비아 문제가 문 앞에 닥쳐있는 현안입니다. 특히 보통명사화한 성 평등 문제는 학내의 주요변수입니다. 이번 학원사태의 동기면서도 진보 운동권이 개입하는 사태의 중심에는 성평등주의자가 일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70년대부터 감리교신학대학에는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이 연계되어 나타나고 80년대는 주사파가 등장하여 활동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기독교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진보운동권을 배출하였습니다. 따라서 교단 총회 역시 이들 운동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대형교회의 중앙 진출을 제지한바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감리교 여성지도력개발원은 꾸준히 활동하면서 총회에서는 15% 총대권을 확보하고 장정개정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양성평등위를 통하여 깊숙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감신대의 독특한 위치는 민족과 함께 민중과 함께 하던 저력이 기독교 사회주의자를 배출하고 좌파 지식인 그룹을 배출한 학교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감안하여 감신대의 미래정책에는 일정부분 여성의 참여와 좌파지식인 그룹의 영향을 고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신학교육의 미래정책에 있어서 문제점은 무엇이고 대안은 있는가에 모아져야 합니다. 그것은 첫째 신학교육과 교회 목회와의 관계 설정에 관한 것입니다. 교육목적과 교육과정의 괴리문제는 신학이라는 학문이 안고 있는 시대적 고민으로서 이론과 실천 간의 갈등문제이며 동시에 복음적 바탕 위에 경건과 학문과의 갈등입니다. 19세기 이후 신학교육의 문제점은 교회를 위한 학문으로서의 정체성과 실천신학의 요구를 채우는 문제였고 이것이 현대적인 상황에서는 목회적 경영학으로서의 실천신학적 과제로 모아진 것입니다. 특히 대형교회가 출현하고 고속 성장한 교회의 목회직이 인기를 끌고 있던 현실에서 우리의 신학교육의 미래는 역시 목회적 경영 마인드를 채워가는 실용주의 노선이 승했고 당연히 신학교육의 기본적인 의무사항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부 급성장한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교회의 사유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교회의 공공성이 해쳐지고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면서 교회의 사회적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90년대부터 산업화의 위기인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가 벌어지면서 교회는 자동적으로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쇠퇴기에 처한 교회는 교역자 수급원칙에 의하여 신학생수를 줄이라 했으나 이기적인 신학대학은 학교 경영의 문제점을 들어 불응하고 소극적 대처방법으로 대처하였습니다. 문제는 교육부의 경영진단과 교육평가가 서슬 퍼런 상태에서 비대해진 학교 경영과 규모의 교육을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현실 고착을 해버린 오늘날의 신학교육 기관은 미래정책이나 있는지 깊은 고민과 성찰을 동반해야 하는 지경으로 내몰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에는 신학교육과 교회 목회간의 일정한 괴리와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6. 신학교육의 미래과제

문제제기 : 현재 시행되고 있는 신학교육의 문제점은 대부분 서구 신학교육의 복사판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 신학교육이념과 목표에 목회자 양성에 대한 강조가 뚜렷하지 않다는 점. 커리큘럼의 근간이 학문형성에 집중되어 있으며 인격형성이나 사역훈련 방법에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는 점. 현 신학대학교 교수들의 직무가 학문연구와 교실강의에 집중되어 있어서 목회현장의 소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점. 그 결과 신학교육이 목회현장과 괴리되어 나타난다는 점.

실천방안 : 신학교육이 지식위주의 신학교육으로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에서 벗어나 교회와 사회를 섬기는 목회자 양성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신학교육은 현장 지향적이면서도 참여 지향적인 목회자 양성에 중점을 두는 교육방법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목회 전문과정과 신학 전문과정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선택하여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목회자 양성 공동 커리큘럼을 설치하고 다양한 목회와 선교현장에서 개인의 특성에 맞는 사역을 개발하여 사역현장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목회선교 실무자를 육성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신학대학교 안에 사역지 알선과 취직을 위한 창구를 개설하고 현장 지도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하고 졸업 후에는 사역지를 알선해주는 전담기구를 설치해야 합니다. 신학교육은 목회자와 전문 선교사를 위한 새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활성화시켜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신학대학교도 산학협력을 위한 체제를 구축해서 글로벌 시대에 맞는 국내외의 대학과 연구소와 교류협력을 주무하는 부서를 세워 교과과정 개선을 도모할 때 우리 신학교육은 하나님 나라 비전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고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교회의 부흥성장과 사명을 감당하는 기관이 될 것입니다.

신학교육이 위기라는 사실이 그리 긴박하게 들리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교단 교역자 수급위원회의 제안은 신학대학교 학생수를 줄이라는 것이고 여기에 부응하는 안으로 2018년까지 감리교 3개 신학대학교에서는 통합신학대학원을 설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현행 신학교수들의 철밥통은 무너지고 교직원 숫자는 줄어들게 뻔하기 때문에 집단적 반발까지는 아니더라도 소극적 대응으로 시간을 끌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통합신학대학원을 설립하고 별도 법인을 만들고 캠퍼스를 조성하는 등의 절차상의 난제 때문에 상당 기간이 소요되고 민주적 절차와 합의가 필요하기에 교단의 정책 주체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아직도 3개 신학대학의 행정책임자와 담당자들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는 내부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철밥통을 손해 보려는 이들이 없고 있다손 쳐도 학문과 실력이 겸전되지 않은 교수요원은 탈락해야 하는 만큼 예민한 문제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심각합니다. 교회 사정만 아니고 우리사회가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 돌아선 이상 2018년 통합신학대학원 설치안은 무게가 있고 있는 만큼 교단의 재원을 염출하고 차제에 신학교육의 개혁을 밀어붙여야 하는 마당에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역자 수급문제에 부딪쳐서 구체적인 시나리오가 나오지 않은 만큼 미래정책에서 다루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미래정책으로 보자면 대안적 공동체 교육 안을 가지고 맞춤형 신학교육을 구상해야 하겠고 이 문제는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필요한 시설은 공동 기숙사건축이고 디지털 환경이 갖추어진 도서관이 시급합니다. 물론 교수연구기금과 장학제도도 중요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기독교 대한 감리회 신학 교육의 미래를 담보하는 것으로 우리 신학대학교의 꿈이자 요구사항입니다. 문제는 앞으로 교단이 취할 자세입니다. 대형교회의 지원책과 신학교육 라운드테이블을 통한 신학교육 대안을 마련하고 교회나 독지가의 재원을 설득력 있게 동원하는 문제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출현이 절실합니다. 이러한 모든 과제들은 교단 자체의 지원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고 전체교회가 참여하는 패스 웨이를 설치하여 중지를 모으고 기도로 앞장서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나마 지금 신학대학교가 분쟁을 하면서 미처 실행하지 못한 신학생 목회실습과 관련한 현장실습과 교육전도사 파송 그리고 해외선교사나 기독교 NGO에 보내는 인턴제도 운영문제가 시급합니다. 특히 현행 수련목사 고시도 과제 중에 과제입니다. 합격률도 문제지만 신학대학교가 실천신학 분야에 부실한 것도 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7. 신학대학교 현안과 교회정치

이러한 최근사태를 곱씹어보자면 중심에는 이사회와 교수 조직 간의 갈등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임기가 종료된 이사회가 총장선임과 이사선임을 놓고 임시 조치권 행사를 하면서 발생한 문제점입니다. 정치적으로 각오해야 한다는 점에서 신학교의 위기를 논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교단인 기장의 한신대의 경우 최근에 새로 선출된 연규홍 총장이 총회에서 인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저항에 부딪혀 고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신대 재학생 가운데 연 총장 퇴출을 놓고 투쟁하면서 자퇴하는 학생만 오늘까지 33명이나 됩니다. 앞으로의 사태가 심각하고 민족 한신, 민중 한신 하던 소릴 듣던 곳이 이제는 총장 하나 망신주고 분쟁하는 학교로 전락한 현실이 한심스럽다는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최근에는 한국교회에서 가장 치사한 교단정치로 유명해진 합동측 신학교인 사당동 총신대에는 해괴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2016년 합동 총회에 총회장으로 출마한 총장 김영우 목사는 이중직문제로 총회장 선거에 좌절됐습니다. 그 바람에 궁지에 몰린 그는 당시 교단 총회장인 박무용 목사에게 돈 2천만 원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당사자인 박무용 총회장이 맡은 돈을 즉각 돌려주면서 검찰에 고발하였습니다. 문제는 총신대 현직총장 신분으로 있으면서 기소를 당하자 김영우 총장은 이사회를 열어도 교원신분인 만큼 불이익을 당하지 않겠다고 정관을 개정하여 총장신분을 유지하게 됩니다. 지금 그는 기소되었습니다. 긴급히 학교정관을 다 고쳐서 총장 직위를 고수했다는 것입니다. 대단하지요. 그전에는 총회 충무를 지낸 사람이 총회 석상에서 배신한 계보원을 향하여 권총을 들이대는 사건이 났던 교단의 민낯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한국교회 정치현실입니다. 이번 성모 목사의 감독선거 선거무효소송에 대한 감독회장을 지지하는 진정서를 내고 난리를 치면서 보조참고인 신청을 냈던 인천의 모교회 모장로를 만나서 협상하여 철회하도록 한 것이나 무슨 차이가 나는지 묻고 싶습니다. 여기에 더한 사건이 감리교신학대학교의 교수 성폭력 문제와 교수들의 항용 벌이는 논문 표절문제입니다. 교수에 대한 신뢰도를 갉아먹고 신학생들을 난감하게 만드는 기술이 대단한 이들이 이번에는 직전 총장 직무대행을 논문표절로 공개망신을 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재수 없어서 논문표절이란 혐의를 뒤집어썼다고 주장하던 윤리교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총추위가 제시한 연구지원금 환수자의 문제도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은 학문연구의 투명성이 문제이지 교수의 자율성을 말해봐야 하향평준화 된 교수사회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풍토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학문의 자유를 말하기 전에 자질론으로 가는 현실에서 교수단에 대한 일반적인 신뢰도가 떨어지고 마는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신성한 학원, 학원, 하지만 실제로는 신뢰도 다 까먹고 학문적 노력도 진정성도 없어 보이는 이들이 교단에 보탬이 되겠는가 하는 깊은 자괴감이 듭니다. 이러한 일들은 이전에는 없던 일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 감신대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선교회가 교역자 후임을 뽑을 때 공공성이 상실하더니 이제는 교단의 얼굴인 신학대학교의 교수들도 공공성을 잃었고 총장선출도 줄줄이 공공성이 상실한 것입니다. 성폭력과 논문표절이 남의 일인 줄 알았는데 우리 신학대학교에서도 빈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돈을 주고 도입한 논문표절 검사기가 있는데도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죄 없는자 돌로 치라고 나가는 교수 요원들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8. 미래정책과 신학교육

이제 저의 소임은 감신대와 감리교단 산하 신학대학의 문제점을 논하면서 학교의 미래, 크게는 감리교단의 미래를 다루자는 것입니다. 오늘 이 모임에서 제안하는 것은 실제로 신학교육담당자들이 그리고 바라보는 목회자들이 일상에서 직면한 문제이고 현안입니다.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지난 90년대 이후부터는 이 문제를 가지고 무수한 세미나와 연구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타성에 젖은 교수단의 특권적 지위를 박탈하고 개혁 프로그램을 실시한 학교나 개인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강 건너 불 보듯 하였던 터입니다. 신학교육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이기적인 교수집단과 여기에 맹종하는 수준 낮은 한국교회가 위기상황을 키운 것입니다. 언제나 모이면 나오는 말이 이론신학자 배출보다는 실천신학교육을 하자는 말도 도제식으로 운영되는 교수진출 방식으로 대치되고 어학실력이, 재정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외국유학을 마친 신학자들이 들어오면서 역시나 그 나물에 그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적어도 개혁의 물꼬를 열자면 한 세대 전에 우수 신학생을 선발하고 투자하고 키우지 않으면 말을 말아야 하는 분야가 바로 신학교육 분야이고 독선과 아집으로 뭉쳐진 신학자들이 교회를 졸로 보면서 생기는 갈등은 교회정치의 줄서기나 진배없는 풍경을 이루는 것이 신학대학교의 교수사회입니다. 이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누워서 침 뱉기이고 마른하늘에 날벼락입니다. 결국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신학자들의 독선과 아집으로 뭉쳐진 철밥통도 문제의 하나인 것입니다. 어렵고 가난한 목회 현장에서는 음악에 재간둥이든 성가대를 잘하는 재간둥이든 교인들과 함께 하는 지도자면 초기 고생은 끝입니다. 17세기 학문분류방식으로 되어 있는 조직신학이다 성서학이다 교회사다 하는 것은 결국은 이론신학과 실천신학인 목회학, 설교학, 상담 심리학, CPE 등을 아우르는 것으로 전체적인 신학분류가 양분되어 있는데 실천신학적 요구가 증가하는 이유는 교회가 성장관리를 위하여 좀 더 고급진 인력을 요구하고 있고 여기에 부응하여 신학교는 학부제를 운영하면서 여전히 소주정예를 양육하는 방식인 도제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에 사람을 키우고 파송하는 것들이 모두 개인이 통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추천서를 써주고 인증서를 발행하고 면담하는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십년이상 씩 고생하여 얻은 Ph.D 학위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교수는 자기 식으로 살아온 방식을 고치지 않습니다. 목사들이 요구하는 것과 차이 나는 교회현장의 요구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작고 어려운 교회의 형편은 잘 알지만 외면하고 현실에 취해서 삽니다.
감리교는 선교사가 통제하는 구조에서 시작되었고 재정이 전적으로 외국에서 왔습니다. 선교사들은 지나친 성과주의에 매달렸고 관료화된 행정책임자인 한국 사람들은 그것에 철저히 순응하면서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월급 받는 재미에 고생하는 줄 몰랐고 후에는 유리한 파송지를 찾아서 감리사에게 충성하였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위계질서가 남아 있습니다. 감리교의 정치 세계는 그런 바탕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지형이 달라진 것은 대형교회가 출현하면서 부터입니다. 교역자회의를 가지 않아도 되고 경영마인드가 있는 개척교회 목사가 건축을 하고 성장하면서 훈련된 교육전도사와 해외로 나가야 할 선교사가 요구되었습니다. 그것이 신학교의 성경공부 제자도 훈련 전도양육 프로그램 등 실천신학 프로그램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실천신학 훈련과 상담목회에 대한 교회의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현대목회의 요청이 실천신학이었습니다. 신학교의 이론신학은 성서를 중심으로 하는 해석학적인 훈련이었지만 웅변하는 실력과 기도하는 생활 태도가 겸전하면서 교회목회에도 경영학과 행정학의 영향이 크게 나타났습니다. 선교학은 대표적인 것이었습니다. 제자화 성경공부는 감리교 속회에서 나왔고 그것을 토대로 삼아 대형교회는 성장하였습니다. 그중에서는 특화된 프로그램이 새벽기도회였고 금요철야기도회 같은 것이었습니다. 목회현장의 혁명을 이룬 것이 대형교회의 성공철학이었습니다. 이러한 실천신학적 변화는 오늘날 한국교회 성장의 원동력이고 마을가꾸기와 지역사회 봉사 프로그램이 복지활동으로 나간 것입니다. 여기에 신학교육의 핵심과제는 1) 간학문적인 성취를 보여주고 2) 성경공부와 영성훈련속회 부흥과 제자화 이론이었습니다. 3) 인문학 연구 붐도 한몫을 하였지만 결정적인 것은 선교학의 인류학적인 발전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신학교육의 주요내용은 이처럼 각성된 세대들이 선교와 목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다음세대로 물려주는 프로그램을 중요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학교는 이러한 과제 앞에 실천신학 교수요원을 확보하는 것이 큰 문제였고 한국 신학교육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2012년 감신대 총장으로 취임한 박종천 총장은 취임사에서도 밝혔듯이 미래청사진을 크게 펼쳤습니다. 1) 신학과 복음전도의 융합을 제창하면서 2) 교회 갱신과 교회일치를 위한 사역자 양성에 주력하고 3) 세상의 빛 된 사명과 소금의 삶을 실천하는 감신출신이 민족통일과 평화를 위한 사역자로 성장하기를 기대하면서 4) 끝으로는 웨슬리 복음주의 유산을 이어받아 복음과 지성과 사회운동을 아우르는 영적 대각성을 이루는 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안처럼 4년 임기를 마치면서 이러한 신학교육의미래를 밝히는 제안은 얼마나 진척이 있었던가요? 실제로는 임기 내내 학교분쟁이 발발하면서 신학교육의 융합과 통합적인 접근으로 기독교 사회변혁의 진원지가 되겠다고 하였던 청사진은 물러나고 대신하여 학내분쟁은 교수 승진에서 탈락된 여성교수를 살리느냐 죽이느냐 하면서 학내에서는 교수 간에 7차례나 고소건이 접수되어 싸웠습니다. 여기에 한 몫 한 것이 교회평의회가 거리를 두고 총장을 공격하고 교회협의회는 측근이 되어 방어하면서 신학교는 패거리 정치로 화하였습니다. 운동권이 개입하고 총장은 재선을 도모하면서 학교는 분쟁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분쟁의 핵심은 여성주의였습니다. 긴급 투입된 동료교수가 진급 중에 있던 조교수의 논문을 심사하여 탈락시켰습니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좌우로 날선 검이 된 학교는 이념적 성향을 가지고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이것이 연장전을 벌인 것이 이번 총장선임입니다. 총추위는 해당 후보자의 논문 표절을 적발하고 연구기금을 환수한 문제를 부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장장 17개월을 끌었습니다.
감신대도 사립학교이고 정부지원은 없고 있다면 학생들이 내는 수업료가 전부입니다. 전 총장 김홍기 목사는 취임하면서 제안한 것이 300억 원 모금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비하면 박종천총장은 개인이 1억 원을 먼저 헌금하고 50억 원 규모의 장학기금을 모금하는 운동을 제안하였습니다. 교수연구기금도 확충하고 학생장학금도 확충하면서 국제화 프로그램을 활성화시키자는 제안도 나왔는데 제2기숙사 건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내사태가 보수 진보 중도로 나뉘어져서 대결하는 가운데 모든 미래정책과 공약들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학내분쟁은 다음 총장 선출에 까지 영향을 미쳐서 제대로 된 공부도 못하고 임기가 끝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기간 동안 감리교 분쟁 사태에 휘말리면서 얻게 된 공공성 상실과 교회의 위기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가부장적인 감리교 교회 정치는 개혁세력의 목소리를 외면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느꼈던 것은 역시 변화에는 둔감하고 이기적인 감리교 패거리 정치는 정치지형의 변화마저도 수용하지 못하는 한계상황임을 통감하였습니다.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이 속도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을 대처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감리교는 결국은 자기 공덕을 과시하고 믿음보다는 자기의 의를 나타내는 목회지향성을 가지고 결국은 헤게모니를 쥐고 자기 맘대로 교회를 운영하려는 아집이 문제였다고 느꼈습니다. 남의 말을 안 듣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정작 중요한 시대의 소명을 느끼고 결단하는 자세는 중요한 것입니다. 독선과 아집을 벗어나서 대류를 느끼고 시대정신을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성경만 계시의 근거가 아닌 이상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결단도 필요한 것입니다. 감이 떨어지고 운동력이 미치지 못하면 지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이미 예상 하던 것이 임시조치권 행사를 위한 이사회 성원이 문제였습니다. 당초 예상했던 대로 비대위측이 조직되어 활동하면서 뒤에서 암약하던 왕대일지지세들은 비상 상황에 돌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진두 목사 카드가 나온다는 것을 예상하였지만 순식간에 상황이 돌변하면서 늑장대응을 한 것입니다. 그동안 왕대일 교수 진영은 일관되게 가처분 고소안을 밀고 나갔고 정치적인 유연성이 없이 일방적인 여론에 시달린 것도 문제였습니다. 그러고 중요한 유경동 교수가 자기가 소속해 있는 영등포중앙교회로 되돌아갔습니다. 이미 7년 전부터 김진두 목사의 총장안이 있었던 비대위측의 수뇌부는 이러한 정치적 변환과정을 통하여 이규학 이사장 측과 임시조치권 행사에 적극 대응하면서 총장후보에 대한 극적인 타결을 본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결정으로 피해를 입은 측은 역시 왕대일 교수 측입니다. 사후 약방문격인 장황한 대자보나 가지고는 사태를 이기지 못합니다.
감리교 사태의 교훈은 이것이었습니다. 초기 3년 동안 정치적 전환은 법원의 판결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정치적 대화나 협상을 피하고 재판에만 몰두한 이유는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되지 않는 대형교회와 협의하거나 속 좁은 기득권들과 대화하느니 차라리 재판정에 나오는 게 낫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김기택 감독회장이 임시로 지정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선 총회나 재선거나 정치적 이득이 없자 뒤로 물러난 가운데 임시감독회장으로 선임된 김기택 감독회장이 실행부에서 감독회장을 뽑는 법안을 상정하고 이어서 감리교를 가장 괴롭히는 세습행위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해 입법총회는 그게 전부였습니다. 정치지형이 바뀐 것입니다. 재판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실제로 2008년 9월 사태는 당시 이임하는 신경하 감독회장이 총회를 무기한 연기하는 선언을 하면서 총회가 무너졌습니다. 직무가 정지되고 속회를 해야 하는데 법적근거가 없는 휴회상태에서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는 대형교회측의 강한 반발은 사태 내내 무거운 부담이었습니다. 감리교의 권력은 질식하기 직전까지 갔다 하는 수 없어서 법원이 직무대행을 지정하고 상무로 돌아갔는데 여전히 문제는 권력의 블랙홀을 빠져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권력의 공백기는 신기식 목사의 재판공세에 힘을 더했고 채권자 신분으로 떨어진 교단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채권자와 채무자 관계에게 압박하는 재판이 위력적이었습니다. 당시는 정치담판보다 법원의 판결문이 먼저였습니다. 2015년 4월 전용재 감독회장과 신기식 목사의 중재합의는 당선무효에 대한 정치적 합의였습니다. 협상은 성사되었으나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전용재 감독회장은 임기 말에 들어서면서 퇴임하는 감독회장으로서 정치적 실책을 거듭하여 7전 7패의 기록을 남기면서 퇴임하였습니다. 이것이 이번 감신대 총장선출 사태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공공성이 없는 정치적 판단과 행동은 불행합니다. 재판이 있고 반대파가 주동하는 상황에서는 패권정치는 실패합니다. 감신대에 학외인사가 총장이 된 것은 1995년도에 이종수 감독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학내사태로 임기도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이번에도 전용재 감독회장의 이사임기를 놓고 김인환 이사장은 감독회장임기 종료를 들어 임기가 만료되었다고 나왔습니다. 일격을 당한 것입니다. 실제로는 감독회장의 임기는 끝났으나 법인이사로서는 임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태가 연장전으로 가면서 전용재 감독회장의 최측근인 비감신 출신 이사가 이사회의 리베로로 나서면서 상황이 반전되었습니다. 어느 측이든지 1명만 오면 이사회 성원을 채우면서 승기를 잡게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이규학 이사장은 임시조치권을 협상을 신경하 비대위원장 하고 약속문건을 작성하였습니다. 비대위는 학교정상화를 위한 구이사회의 성원을 방조하면서 학외인사를 총장으로 선출하는데 동조한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임기가 종료된 구이사회가 임시조치권으로 총장을 선출한 것입니다. 반대파인 9인위는 발끈하였습니다. 학내여론도 냉각되었습니다. 그러나 9인위의 소극적인 정국운영은 지고 말았습니다. 학내의 여론도 좋고 졸업생의 지지를 받았던 왕대일 교수는 재판에서 패배하고 구 이사회의 총장선출로 이중적인 패배를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극적 전환은 감리교 정치의 묘수였습니다. 속도감 있는 변화와 야멸찬 정치속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입니다. 이사장 선출과 새로운 이사회 구성이 남아있습니다.
여성신학자인 교수가 돌을 맞았는데 교회정치는 둔감합니다. 여전히 여성은 다수인데 교회 내 가부장적 정치 생태계는 여성해방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감리교 여성운동의 개발 노력은 갈 길을 더 가야하나 봅니다. 왕교수의 행보도 문제입니다. 교수협의회도 아니고 그렇다고 확실히 교수평의회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키워준 감리교신학원을 상대로 재판을 한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수입니다. 여기에 논문표절이다 연구기금환수다 하면서 학자로서의 문제점도 노출되었습니다. 현재 감신대학교 교수사회는 천하삼분지계입니다. 신학적 처방을 내리기 이전에 기초에 충실하고 인격적인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연찮게 잘못되는 수가 있습니다. 새로 선임된 총장이 겪게 될 난관은 교원임용입니다. 이 문제는 반듯이 화를 부를 것입니다. 지금 취업하려는 교수 준비생들은 줄대기를 시도하고 있고 세력들은 이합집산을 시작할 것입니다. 머릴 싸매고 달려들 것인데 문제는 실력이 아니고 연줄입니다. 이것은 불길한 징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파탄을 불러올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룩한 교회를 농단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공공성을 지키라는 것이고 도덕성을 상실한 정치꾼들의 꼼수에 놀아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감리교 교수임용 문제는 어스름한 저녁에 쓸쓸히 집으로 오는 어부 짝이 날까 두렵습니다. 교수협의회 교수평의회 교수연합회까지 있는 감신대 교수판도는 미래정책을 아무도 신통하게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바닥을 우습게 알고 호가호위하면서 지낼 것입니다. 거기에다 학교 학생들도 천하삼분지계입니다. 신대원 학생회 여학생회와 학부 학생회가 있고 또한 학부의 과학생회와 운동권까지 있으니 학생세력도 백가쟁명할 모양세입니다.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오직 유일한 대안은 정직하고 순결하게 학교를 위해 기도하는 학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래를 결정하는 길입니다.

9. 기금모금 제안

앞으로 중요한 과제는 모금활동내지는 모금운동입니다.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백년대계는 기금조성입니다. 이를 위한 전 단계 홍보활동은 신학교육정책연구를 위한 장단기발책을 논하면서 미래 정책개발을 위한 라운드 테이블입니다. 여론조성과 함께 감리교 동문과 교회를 설득하는 작업을 하여 교회와 신학대학 졸업생들을 한데 엮는 라운드 테이블을 굴려야 합니다. 그러기는 연구기금조성과 관련한 전문기구를 학교 내에 설치하고 선교기금 모으듯이 조직적으로 학교발전기금을 모금해야 합니다. 장학기금 운동부터 시작하고 캠퍼스 개발과 기숙사 건축도 착수해야 합니다. 신학생 취업을 위한 전담기구를 설치하고 교육전도사 파송과 신학생 인턴 파송을 정착시켜야 합니다. 비전트립처럼 미국도 보내고 선교현장도 보내야 합니다. 현장학습을 중히 여기는 전략으로 신학교육의 과제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신학자와 목회자 연석회의를 기반삼아서 신학교육 교과과정에 1) 간학문적인 융합과 2) 인문학적 소양으로 성서언어인증서 영어인증서 발급 3) 실천신학적 프로그램 개발과 성경공부 4) 글로벌 경쟁력 제고를 위한 교류협력사업을 해야합니다. 이것이 감신대의 국제화 프로그램입니다. 특히 미연합감리교 고등교육국과의 협력사업과 연계하여 같은 주제의 다른 지역의 교과과정 개편과 에큐메니칼 신학교육과의 협력사업도 수용하여 역내의 정의 평화를 위한 교육과 협력사업을 전개하고 신학생들의 영어사용 실력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추가할 것은 9개의 감리교단 산하 선교사훈련센터의 창구일원화를 기하여 통합신학대학원내에 설치하여 선교사후보 선발부터 파송실습까지를 관장하는 기구를 설치해야 할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기숙사를 통한 영성생활을 보편화하고 학생기도그룹을 육성하고 개인 멘토링 시스템과 인문학적 소양을 배양하는 특별 프로그램을 고려해 봐야 합니다. 그중에 필리핀 어학연수와 미국 영국 등에 있는 감리교 연수시설을 정례적으로 방문하는 등 어학연수를 강화하여 현지화 시켜야 할 것입니다. 교단의 주류 신학교라는 자존감을 세우면서 동시에 글로벌 시대 신학교육의 경쟁력을 제고 하는 재원염출과 우수교원 확보에 만전을 기울이고 가장 많은 학생을 배출하는 학교답게 감신대학교를 미래가 보장되는 학교로 육성시켜야 합니다. 감신대를 감리교단 글로벌 경쟁력을 개발하여 감리교 미래 좌표를 경정하는 학교로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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