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경회 때 받은 큰 울림
사경회 때 받은 큰 울림
  • 민돈원
  • 승인 2017.02.18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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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회는 지방회가 있고 각 지방마다 매년 교육부가 주관하는 사경회와 선교부가 주관하는 웨슬리 성회 등 적어도 두 차례는 모두 공통적인 연례행사이다. 이 행사는 예로부터 새벽, 오전, 저녁마다 실시되어 오던 성회였다. 그리고 더욱이 중요한 것은 지방회에 속한 모든 교회가 연합으로 하나되어 자기 교회 예배를 집회 장소로 옮겨 함께 참석하는 것을 당연히 여겨왔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집회 시간이 어떤 지방은 새벽과 저녁으로 줄어든 경우가 있고, 심지어 어떤 지방은 저녁 한차례씩 3-4일 하는 것으로 끝내고, 오전에 하는 사경회조차 아예 없는 곳도 있다. 그리고 연합이라고 하지만 교인들과 함께 참석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개신교회의 맹점인 공교회성의 퇴보가 보이는 증거중의 하나이다.

바로 내가 속한 이곳 지방이 세 가지 모두 부끄럽게도 그러했다. 식사하면서 감리사에게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10여전부터 모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렇게 한번으로 결정권자들이 저녁 한번으로 했다는 것이다. 이래서 지도자들의 판단과 결정에 따른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제 와서 외친다고 한들 원상복구하기에는 너무나 멀어져 버린 셈이다. 성도들이야 결정한대로 따르니 잘못이 있겠는가? 잘못이라면 ‘그래도 3번씩 합시다.’ 라고 우직스럽게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역시 책임도 피할수 없으리라 여겨지지만 사실 여러 번 참여하는 것을 그렇게 또 원하는 사람들이 솔직히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요즈음 무슨 행사를 하면 설교자들에게 주문하는 말이 있다. ‘짧게 해주세요, 심지어 어느 연회에 있었던 체육대회 때 1분 안에 끝내주세요’ 라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그러자 환호하는 박수가 터져 나오는 당시 현장에 있었던 나로서는 마음이 편치 못한 경험이 있다. 이런 일들은 결코 좋은 현상은 아니지 않는가? 설교 듣는 것은 그 다음 행사를 위한 부수적인 요식 행사로 전락해 가는 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지방 성회에서 받은 울림 한 가지가 있었다. 룻기1-4장을 4번의 성회기간 한 장씩 전하는 말씀이었다. 책임과 사명이 큰 틀의 주제였다. 마지막 수요일 밤은 4장에 나오는 내용으로 보아스가 아무개라는 사람에게 아비멜렉의 땅을 물려받으라고 하자 처음에는 물려받겠다고 하고서는 나중에 손해가 날 것 같으니 안하겠다 라는 내용을 중심한 책임과 사명에 대한 하이라이트와 같았다.

그러면서 이 말씀을 뒷받침하기 위해 강사가 담임하는 교회에서 일어난 이야기에 그만 나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하염없는 눈물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그 이야기인즉 이러했다. 몇 년 전 교회학교 여름행사를 마치고 교사들 위로회를 시원한 물가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물가로 들어가 즐기다 그 교사들 가운데 3명이 그 물에 빠져 1명은 간신히 살아나고 20세 청년 2명의 익사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 당시 이 교회는 7층 건물의 건축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4층이 올라가는 공사 도중이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앞이 안 보이는 캄캄한 악재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었으리라.

늦은 시간 교회로 돌아와 예배당에 들어서는 순간 수 백 명의 기도하는 성도들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 강사는 심각한 문제를 놓고 장로님들과 대책회의를 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장로님들이 제시한 이런저런 이야기가운데 인솔자중에 누가 물에 들어가자고 했는지 알아보자, 원인을 그 현장 사람을 불러다 물어야 한다는 등 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담임목사인 강사는 그런 것보다 ‘교회가 이 책임을 모두 져야 합니다.’였다는 것이다.

사안으로 볼 때 이 자녀를 둔 부모가 어떻게 취할 것인가, 관계 당국에서 수사를 해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위해 준비 답안도 마련해서 책임을 모면하기 보다는 교회가 모든 책임을 지고 최대한의 보상금도 마련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부모에게 가서 전달하자 몇 분 안 되어 적지 않은 금액을 다시 목사님에게 고스란히 가지고 와서 도리어 위로하며 건축헌금으로 드리자 두 번째 자녀를 잃은 부모도 건축비로 내놓았다고 한다. 강사 자신도 이제 목회가 끝났다고 생각할 만큼 암담한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문제 해결중의 하나가 책임을 지겠다는데 있었다고 한다. 더욱이 살아가면서 억울해야 사명이다 라는 것이다.

룻4장에 나오는 이름 없는 아무개는 손해 보니까 보아스가 제시한 그 땅을 포기해 버렸다. 결국 그 시점에서 다윗의 조상이 될 수 있는 예수그리스도로 이어지는 믿음의 족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땅의 기업은 보아스가 받아 누리게 된다.

여기서 나는 중요한 보화를 찾는다. 손해 볼 줄 알아야 진정한 믿음이다. 진정한 믿음과 사랑은 손익계산서에 근거하지 않는다. 내게 큰 위험과 내 인생이 끝났다, 이러다가 내가 현재 누리고 있는 보장을 다 잃어버리는 것 아닌가? 라고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을 때, 특별히 지도자가 가져야 할 자세는 그 때에도 책임질 줄 아는 자가 진정한 지도자이다. 탁월한 지도력은 책임감에서 나온다. 라는 결론을 얻었다.

오늘 나라가 어지럽고 교계가 혼탁한 이유의 근본적인 원인 역시도 이 책임과 사명이라는 지도자가 지녀야 할 부동의 가치를 너무 소홀히 여긴데서 온 귀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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