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기념예배당을 건립
고종황제기념예배당을 건립
  • 이길극
  • 승인 2017.02.05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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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의 독립구국운동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설계 및 추진자 이길극 목사

▪중부연회 연수서지방 동춘교회 담임목사
▪고종황제기념예배당 건립준비추진위원장
▪김기범 김창식 한국 최초목사 기념예배당 건립추진본부장
▪기독교대한감리회 의료선교회 사무총장

 

▲ 1907.4.20. 고종밀서

고종황제는 1884년 7월 3일 미국감리교회 선교부에서 조선정부에 파견한 로버트 S. 맥크레이 목사에게 선교를 윤허하였다. 이로서 개신교회는 국왕의 보호 속에 감리교회를 선두로 장로교회, 침례교회 등 형제 개신교회단들에게 열린 조선 백성들의 구원 사업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일제 학정 전후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일제 식민사관에 물들었다는 것을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우리 역사를 일제가 목표하는 주입식 식민사관에 잠겨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의 역사왜곡은 상고사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스스로도 고종황제의 구국 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고찰보다는 무관심하지 않았나하고 선교역사적 관점에서 돌이켜본다.

고종은 1880년대 이후 서양제국 열강의 개항요구와 개항즉시 청.일.러 3국의 한반도 침탈 3파전 앞마당이 되었던 치열한 국제 식민지쟁탈전 시절에 조선 26대 국왕으로 봉직하였다. 쇄국된 국가의 개항과 함께 국가발전의 소망을 1884년 7월 3일 개신교회 즉 미국감리교회 선교활동을 윤허하면서 기대하였다. 『奏許美上船內海事及 許美國人設病院及學校事及 許設電信事』 (주상께서 미국상선이 조선바다에 사업하는 것과 미국인이 병원설립 학교사업과 전신사업 윤허하셨다).라는 윤치호의 일기이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두 번째 건립된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선포와 광무황제로 즉위하여 조선이 열강 제후국들과 동등함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고종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조정 내부의 분열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후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력은 무력화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교회를 중심으로 학교와 사회의 기독교유관단체 등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소집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선교사 헐버트 목사를 측근으로 하여 준비한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밀파하였다. 파견의 의지는 열강제국에 알려진 1905년 을사늑약이 대한제국 황제의 뜻과는 달리 일본제국의 강압으로 체결되었으며 대한제국 황제의 옥쇄도 날인되지 않은 강제 불평등조약임을 폭로하고 파기하려고 하였다함을 알리며 국제협력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뿐만아니라 1906년 독일 빌헬름 2세에게 을사늑약 원천무효 밀서를 보내기까지 하였으나 협력이 없었고 이 일들을 빌미로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를 당하였다. 퇴위 12년째 되는 1919년 1월 21일 일제 독살설에 의한 고종황제의 승하는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 전국 운동으로 터져 나왔다. 그리고 90년이 지난 2009년에야 일제의 황제독살설은 사실로 밝혀졌다. 결국 고종황제의 승하는 대한독립 3.1운동의 시원이 되었다.

▲ (좌)고종황제와 (우)미국의 제21대 대통령 Chester Alan Arthur

 

▲ 고종황제밀사(왼쪽부터 이 준, 이상설, 이위종)

1882년 5월 22일 조선과 미국이 수교하였고, 1883년 6월 조선보빙사절단이 미국에 파견되었으며, 동년 9월 18일 미국 21대 아더(Chester Alan Arthur) 대통령과 고종의 국서교환이 있었다. 이 보빙사의 동선 중에 워싱턴 볼티모어 러브리레인 감리교회 가우쳐 목사와 조우하게 되고, 가우쳐목사는 오랜 지기였던 매클레이 박사에게 조선 선교를 타진하도록 요청하면서 1884년 7월 3일 고종의 윤허를 받게 된 바를 이미 주지의 사실들이다.

고종의 선교윤허는 한국 백성들에게 국가가 못다 베푼 혜택을 개신교회 학교 병원 교회 사회단체 들을 통하여 중요한 도움들을 받게 하였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민족 독립을 위한 개신교회 내에서 목사와 교인들과 천도교에 대하여 처절한 독립운동을 박해하고 처단한 역사가 분명히 한국사에 피묻어 적혀있다.
당시는 병원, 학교 그리고 교회들이 영혼 구원과 사회적 봉사를 위한 결실이 막 무르익으려할 때였는데, 가장 좋은 선교역사와 발전의 시기에 일제가 쐐기를 박으면서 오늘날 까지 상처를 덧나게 하고 있는 것이지 않나. 세계기독교회사에 선교100년도 되지 않은 한국의 교회 부흥이 일제의 강압 폭거가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지금 21세기 보다는 훨씬 강력한 한국 교회가 되었을 것이었다고 되돌아보며 생각한다.

사실 고종황제의 윤허가 없었다면 어떻게 감리교회는 물론 개신교회의 선교가 진척되었을까 생각해 볼만하다.

한국 최초목사가 된 김기범이 전도사 시절에는 고종황제 탄신일을 맞아 1896년 9월 2일 탄신경축가를 자작시로 교인들과 함께 노래하였다. 역시 김기범과 함께 한국 최초목사가 된 ‘조선의 바울’ 김창식이 1884년 선교윤허 이후 조선 이북 최초로 선교로 평양 남산현에 전도하고 교회개척 중에 구타당하고 구금되었으며, 1894년 5월, 사형 당할 운명이었지만 선교사들의 구명운동의 사면령 전보로 살아났다. 고종이 특별사면령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나라 신교육의 효시인 배재, 이화, 배화, 영화, 송도, 대광, 영명학교, 연세대, 등 학교와 세브란스병원(광혜원), 동대문 보구여관, 정동 시병원, 등등이 결국 고종의 은덕을 입었다 할 것이며, 특히 유관순 열사는 영명을 거친 이화 출신으로 독립운동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 감리교회 장로교회 출신 16명도 고종 윤허의 신교육의 혜택을 입은 이들이었다.

3.1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1919년 2월 8일 동경YMCA에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 결의가 3.1 운동의 시발이 되었는데, 그 본산인 서울YMCA는 고종황제 황실의 후원과 워너메이커의 기부로 신축사옥으로 건립되기도 하였다.

▲ 해방 후 환국하여 고종황제의 능을 찾은 백범(오른쪽 다섯번째), 오른쪽 세번째는 선우진 비서(1946. 7. 24)
▲ 1919년 2월 28일 고종황제의 국장 예행 연습 때, 서울 광화문통 '고종어국 40년 친경기념비' 앞에서 슬픈표정으로 덕수궁쪽을 바라보고 있는 국민의 모습

3.1일 운동 후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주석을 지냈던 김구의 본명은 김창수였다. 김창수는 명성황후 시해자라고 생각한 일본 군인을 살해한 1896년 2월 하순 치하포 사건으로 제물포 감옥에 구속되어 일제에 의한 사형 압박을 받고 있을 때, 제물포-서울간 전화가 개통된지 사흘째 되는 날, 고종의 전화로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던 극적인 사연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1946년 7월 24일 해방후 환국하여 고종황제의 홍릉을 찾아 생명의 은인 고종을 추도하였다. 한편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1896년 9월 명성황후 살해 복수극인 춘생문 사건에 연루되어 도피생활하면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는 한결같이 충군애국의 항일운동이 이렇게 비분강개한 백성들 천지였다.
김창식목사와 김구주석 만이 아니고 한국 개신교회와 관련기관은 모두 한결같이 고종황제의 은덕을 감사하고 고마워하며 기리어야 했지만 일제의 식민사관이 짓눌렀고, 역대 위정자들이 이런 일을 소망하지도 않았었다.
원래는 고종황제가 황제즉위식을 거행하면서 하나님(상제)께 기도드리는 환구단(원구단)이 1897년 10월 12일, 건립되어 황궁우(위패안치소)와 함께 있었다. 하지만 일제가 경술국치 2년 후인 1912년에 고종황제의 이 기도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철도 호텔을 만들었고 다시 조선호텔이 들어섰다. 한 장소에 있었던 황궁우는 현재 조선호텔 북쪽에 남아있는데 환구단 자리에 조선호텔이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 백성 어느 누구도 대한제국이 합법적으로 망국되었다고 하는 사람 없다.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로 대한민국으로 국체가 변화되었을 뿐이다.

나는 여기에 이르러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침탈하지 않았다면,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고종황제선교윤허기념예배당을 당시에 건립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사실 현재, 고종을 배알하였던 아펜젤러를 비롯하여 스크랜턴, 가우처 등 선교사들과 백성으로서 그들의 전설적 신앙을 기념하는 예배당들은 많이도 건립하였는데, 오히려 고종황제기념예배당은 왜 아직 없었을까. 이제라도 건립하면 된다. 그리고 후대 미래세대에 한국교회에 남겨주면 된다.”
고종황제기념예배당의 외양은 일제가 철거한 환구단이 십자가건물 위에 재건된 건축물 형상이다. 건축물 이름의 뜻은 ‘고종광무황제기념 및 대한국민지성소’(영문; Kwang Mou Emperor Ko-Jong and Kookmin Sanctuary: 약칭 KMKS)이며 간략하게 고종황제기념예배당이라 명명하였다.

중부연회 관내에 ‘한국최초목사 김기범 김창식 기념예배당 건립’은 분명하며 지난 주간에도 건립후원금이 답지하였다. ‘고종황제기념예배당’은 서울에 건립 추진 중에 있으며 100분의 1의 설계도를 완성하였고, 100분의 1 축소모형도 이미 만들었다. 2019년은 고종황제기념예배당, 2021년은 최초목사기념예배당건립 순서로 진행되고 있다.
고종황제 시절에서의 데쟈뷰로 ‘겸손하고 강력한 한국교회가 될 수만 있다면, 그래서 고종황제기념예배당을 건립할만 하다 하겠다.

▲ 고종황제기념예배당 예상 100분의1, 축소 실제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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