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마라
울지 마라
  • 이구영
  • 승인 2016.10.21 0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도 하셨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 라고도 말씀하셨지만,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울지 말라는 말씀을 더 많이 하셨습니다.
-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의 두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는 그들을 붙잡고 함께 아파하며 눈물짓고 위로하셨지만 동시에 울지 말라고도 하셨습니다. 오히려 울고 있는 마르다에게 나사로가 뭍여 있는 동굴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서 많은 사람들이 슬피울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들이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그러니 슬피 울지 말라고...
- 나인 이라는 자그마한 성으로 들어가실 때 너무 슬피 울려 장지를 향하는 한 무리의 행렬을 보셨습니다.
외아들을 잃고 삶의 의미와 맛을 잃어 애통하는 여인에게 주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무덤을 찾아왔던 막달라 마리아는 아주 슬프게 울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무덤안에 계셔야 했던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겼거나 반대자들에 의해서 훼손되어 없어졌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막달라 마리아는 크게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이러 이야기들에 보면 사람들은 울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당연이 울어야 할 상황이 되어서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울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그들은 울고 있었을까요? 또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울어야 할 상황인데 왜 울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울음입니다.
살다 보면 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의 죽음앞에 울고 있습니다.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도 아깝게 일찍 세상을 떠난 소녀를 불쌍히 여기며 아주 자연스럽게 울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앞에서 두 여동생은 당연히 우는 것이 맞습니다.
나인성의 과부도 자기 외아들의 죽음앞에서 운 것이고, 막달라 마리아도 상실의 슬픔에 울고 있습니다.
이들의 울음에는 절망이 있고, 슬픔이 있고, 끝 이라고 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다 끝난 것입니다. 더 이상의 아무런 미련이나 가능성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껏 우리의 삶의 경험이나 내 지식을 다 종합해 볼 때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기에 그들은 그렇게 울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물이 여전히 마르지 않습니다. 절망이 후회가 슬픔이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앞에서, 헤어지기 아쉬운 사람들과의 이별앞에서,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삶의 절망앞에서, 후회와 안타까움 앞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낙망하며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같은 상황에서 전혀 예상치 않은 말씀을 하십니다. 울지 말라고!
왜냐하면 그것이 끝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볼때는 끝이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분명 끝이 아니었습니다.
- 말씀하신대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소녀에게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니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고 감격이 되고 놀라움이 되었습니다.
- 마르다가 오빠 나사로가 죽어 묻힌 동굴의 큰 돌 문을 열어 젖히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온 몸에 붕대를 감은 나사로는 벌떡 이러나 죽은지 사흘이나 지났지만 걸어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생명을 그에게 불어 넣어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다시금 생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끝이라고 생각하고 울었는데 그 끝, 그 절망이 예수님께는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 나인성 과부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살이라도 해야 할 만한 상황이었기에 그리 슬피 울었지만 예수님에게는 그 절망의 상황이 새로운 삶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끝이라고 보지 않으시고 하나의 과정, 하나의 장소 옮김정도로 보셨습니다. 마치 연극의 1막이 2막으로 바뀌고, 영화의 한 장소가 다른 장소로 바뀌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셨습니다. 그랬기에 그분은 죽음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소망을 가르쳐주셨습니다.
- 예수님을 잃어버렸다고 상심하며 우는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나타나셔서 울지 말라고! 네가 찾는 그분은 네 생각대로 돌아가시고 시체마저도 훼손되신 것이 아니라, 니가 생각하지 못했던 제 3의 방법으로 부활하신 것임을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의 생각에 끝이고 절망이고 슬픔인 것이지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한 과정이고, 내가 간단히 넘어야 하는 얕은 산이고, 또 다른 출발을 위한 시작점일 뿐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분은 언제나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말라고! 이게 끝이 아니라고, 절망하지 말라고 오히려 소망을 가지라고, 슬퍼하지 말라고 이제 판이 바뀔 것이니까 기뻐하고 기대를 가지라고!

하나님께서는 흙을 사람으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뼈들을 살리셔서 생기를 불어 넣으사 큰 군대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자를 고치시고, 아파하는 자들을 위로라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오늘 우리의 아버지!, 보호자요 후원자이십니다.

그러니 무엇이 그리 슬프겠습니까?
실패라 할지라도, 몹쓸 병이라 할지라도, 행여 죽음이라 할지라도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점에 불과하고 하나의 과정이요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니 말입니다.

이 믿음으로 울지 말고 넉넉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며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이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