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사랑과 믿음의 종 빌레몬(몬 1:4~7)
50. 사랑과 믿음의 종 빌레몬(몬 1:4~7)
  • 주성호
  • 승인 2015.12.15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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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은 '애정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소아시아의 루쿠스 계곡의 골로새 사람이요(빌 4:9) 종을 거느리고 살 정도로 부요한 자였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시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할 수 있다(행 19:9~10).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집에서 예배드리면서 시작되었다. 지난번 여행 때 라오디게아 교회 터를 거쳐 골로새에 갔었는데 다른 곳엔 돌기둥이 남아있던가 아니면 돌무더기라도 있었는데, 골로새는 버스를 세우고 밭길로 한참 걸어 들어 가서 벌판만 보았다. 제법 큰 거북이가 기어 다니는 것을 보았는데 교회의 흔적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쨌든 오늘 본문의 빌레몬은 바울의 신임을 받아 사랑 받는 동역자라 불렀고 부피는 작지만(25절)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부탁하면서 빌레몬서를 보냈다. 물론 빌레몬은 바울의 부탁을 사랑과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다.

첫째: 신임을 받은 빌레몬

1) 바울의 신임을 받음(몬 1:1~3)
바울의 이전 서신에서는 사도의 권위를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본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옥에 갇힌 종의 입장에서 겸손의 미덕을 보였다. 그것은 본서가 명령을 위해서가 아니고 간청하기 위한 바울의 심정의 표현이다. 그리고 빌레몬을 가리켜 '우리의 사랑을 받는 동역자' 라고 함은 그만큼 빌레몬이 바울의 신임을 받고 있음을 의미 한다.
인간 생활을 하는데 신임을 받고 도움이 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세상에는 오히려 짐이 되고, 부담이 되고, 아니면 없는 것보다 못한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성도는 어쩌면 모든 사람에게 우선 인정받는 사람으로 어디서든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이어야 한다.
롬14:18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는 물론 사람에게도 칭찬 받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바울은 빌레몬을 사랑 할뿐 아니라 '동역자'라고 했는데, 이는 바울의 애용어로서 그의 서신에 12번이나 사용된 말이다. 바울 이외에는 요한삼서 8절에만 보일 정도이다.
바울이 동역자로 부른 사람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롬 16:3), 에바브라디도(빌 2:25), 클레멘트(빌 4:3), 디모데(딤전 3:2),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몬 1:24) 등이다. 오늘 본문의 빌레몬도 동역자라 한 것은 당시 바울에게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준 필요한 인물임을 말해준다.
특히 빌레몬서에서는 바울은 한 불쌍한 노예의 구원을 위해 부탁하고, 빌레몬은 노예 오네시모의 상전으로서 바울의 부탁을 받아드려야 하는 입장에서 함께 동역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사랑과 믿음이 뛰어난 빌레몬(몬 1:4 7)
바울의 많은 서신에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어투가 있는데 그는 다 감사하기를 잊지 않았다. 특별히 빌레몬서를 쓰면서 감사한 이유는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5절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사랑은 성도를 대함에서, 그리고 믿음은 주 예수님을 대함에서 연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빌레몬의 경건한 신앙생활은 사랑과 믿음으로 주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도 칭찬 받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교훈해 주고 있다. 오늘 우리 성도들도 사랑이 이웃에게 행함을 통해 나타나고 이 같은 생활로 믿음이 증거 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는 부족과 취약성을 깨닫게 된다.
6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 하느니라." 즉 성도는 일상생활에서 그의 선이 증거되어지고 증거 되어진 선을 통해 주님께 영광 돌리게 된다. 사랑과 믿음의 결과는 평안을 가져다 준다. 평안을 얻었으니 (ajnapauvw)는 고통이나 비애를 멈춘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마 11:28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진정한 평안은 예수 안에서 사랑과 믿음을 통해 주어진다. 이 같은 모습을 본 바울은 그것으로 매인 몸이지만 기쁨과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둘째: 빌레몬의 신앙과 성품

1) 용서의 사람(몬 1:8~21)
바울은 노예였던 회개한 오네시모를 그의 상전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부탁을 하였는데, 빌레몬서를 쓰게 된 동기도 그렇지만 바울은 내가 옥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용서하라는 것이었다.
바울은 자기가 전도해서 제자 된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도 있지만 사랑을 인하여 간구 한다고 하면서(8~9절) 사랑으로 호소했다. 10절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해 네게 간구 하노라."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도망자 노예는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는데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용서는 물론이지만 16절에서 종으로 아니고 형제처럼 대해달라는 것이었다.
14절에서 억지로가 아닌 자의로 하기 바랐다. 당시 로마 제국은 전쟁으로 방대한 판도를 지배했는데, 전쟁에서 지면 대부분 노예로 끌려 왔으므로 로마제국 내의 노예의 총수는 약 6,000만이나 되었는데 이는 자유민의 4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로마 시에만 노예의 수가 65만 명이나 되었고 어떤 부호가 죽었을 때 유산으로 4,116명의 노예를 남겼다는 종말적 기록으로 그 규모를 엿볼 수 있다.
노예는 살아있는 상품에 불과했고 인격은 인정받지 못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도 노예는 열등 인종으로 논하였고, 세네카는 노예는 원수시 하라고 가르쳤다. 이런 노예가 도망치면 무조건 죽여 버리는 때에 바울은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처럼 대하라는 것이었다. 있을 수도 없는 부탁이다.
그러면서도 한편 왜 기독교가, 바울까지도 노예 제도에 대해 항변하지 못하였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겠지만 바울의 경우를 보면 물리적, 표면적 저항운동보다(Lightfoot) 노예 석방 이상의 교훈을 주고 있다고 했다.
그 후 노예제도의 개선은 물리적인 항거운동이나 법을 뜯어고치는 방법이 아닌 예수의 사랑의 감화 운동이 점차로 주효하여,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예수의 정신이 법률에 반영되어 노예제도 폐지로 한 걸음씩 전진했던 것이다. A.D. 312년에 법률로 노예 옹호법이 제정되므로 노예를 무제한 석방하게 되었다.
바울은 빌레몬서에서 구구절절 양심에 호소하면서 오네시모의 부채까지 떠맡을 테니 용서하라고 빌레몬의 양심에 호소했다(18절). 주님의 사죄의 은총을 힘입은 성도는 원수를 갚거나 미워할 자격은 없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는 길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마 5:44~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바울은 엡4:32에서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하였다.

2) 화해의 사랑(몬 1:17~21)
빌레몬은 당시 노예제도로 보아 용서도 불가능하고 화해도 있을 수 없으나 바울의 간곡한 부탁의 서신과 함께 도망갔던 오네시모를 친구로 또는 동역자로 여기고 바울을 영접하는 심정으로 그를 대해 주었을 것이라는 데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빌레몬은 이미 사랑과 믿음으로 인정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종 된 우리를 구원하여 자유하게 하시고 지금도 신령한 교제를 나누고 계신다. 그 같은 은혜를 받은 성도인 우리는 각박한 이 세상에서 살면서 용서를 통해 화해의 사신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고후 5:18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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