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이용도 목사의 삶과 영성
[신간] 이용도 목사의 삶과 영성
  • KMC뉴스
  • 승인 2015.11.24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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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시기에 극적인 삶을 살다간 이용도 목사의 삶과 영성 세계 탐구

‣ 이 책은

“머리에 돌 백이기까지 주를 따라 나갈 것인데 우리가 약하구나!
그저 기도합시다.
기도의 불이 살아 있는 유일의 증거구려.
욕을 먹으면서라도 기도합시다.
쫓겨내어도 기도합시다.
최후에 승리는 기도자들에게 있을 것이니…”
- 이용도

신비주의자, 부흥사 등으로만 알려져 있던 이용도 목사를 심도 있게 탐구한 책이다. 특히 그의 생애 주요 사건과 그가 남긴 일기, 편지 등 다양한 자료를 중심으로 이용도 목사의 영성 세계를 전통적 영성의 관점에서 살핀다. 더 나아가 이용도 목사의 영성이 21세기 한국교회에 어떠한 의의를 갖는지 알아본다.
이용도 목사의 영성은 성화, 자기부정, 피조물 사랑, 이타적인 삶의 열매로 정의된다. 이는 매일 2시 반경에 새벽기도를 시작으로 통성기도, 산기도 등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이용도 목사의 신앙생활로 맺힌 열매이다. 저자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고 경험한 바 있는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영성훈련 방법이 바로 21세기 영성의 비결임을 강조한다.
한편 어린 자녀를 비롯한 가족의 죽음, 일제하의 암울한 환경, 자신의 쇠약한 건강상태와 끊임없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기쁨을 누렸던 이용도 목사의 모습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준다. 더불어 신학적 천재이자 탁월한 영성가였던 이용도 목사가 어떠한 이단적 요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논쟁과 오해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원인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는 이용도 목사의 긍휼한 마음과 사랑,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의 신앙을 만나게 된다.
부록으로 생전에 이용도 목사와 친밀한 우정을 나누었던 피도수(피터스) 선교사 인터뷰를 소개하였다.

‣ 지은이 김수천 교수
협성대학교 신학과 영성신학 교수
협성대학교 신학과 및 대학원 졸업
미국 Fuller Theological Seminary 졸업(M, Div. & 철학박사)
한국영성신학회 총무
예수영성대학 연구위원 및 주강사
협성신학대학원 Wesleyan Spiritual Formation Center Director

주요 저서
󰡔영성으로 본 중부연회 80년사󰡕, 󰡔침묵기도의 삶-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내적 고요의 길󰡕(제7회 한국기독교학회 소망학술상 수상), 󰡔내게 천 개의 목숨이 있다면 I, II󰡕(한국교회사학회 & 한국복음주의 역사신학회 편)

‣ 차례
이용도 목사의 생애 스케치 13

1부 이용도 목사 영성 연구의 가치
1. 이용도 영성 연구의 발자취 16 | 2. 이용도 영성 연구의 목적 18

2부 이용도 목사 생애의 주요 사건들
1. 독립투사로서의 이용도와 부흥사로서의 이용도 30 | 2. 목사직 휴직 처분과 서울연회의 복권 조치 51

3부 서구 기독교 사상가들이 이용도에게 미친 영향
1. 임마뉴엘 스웨덴보리의 영향 78 | 2. 레오 톨스토이의 영향 83 | 3. 토마스 아 켐피스의 영향 89 | 4.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 95 | 5. 서구 사상가들과의 비교의 종합 97

4부 이용도 목사의 영성
1. 내적 평화를 가능하게 한 자기부정의 영성 106 | 2. 예수의 임재 경험과 연합의 영성 122 | 3. 진정한 변화와 이웃 사랑의 영성 139 | 4. 피조물 사랑을 통한 창조영성 151 | 5. 전통적 서구 영성의 관점에서 본 이용도 영성 165

21세기 한국교회를 위한 이용도 영성의 의의 177

부록_ 피도수 선교사 인터뷰 189

‣ 이용도 목사의 생애 스케치
이용도는 1901년 황해도 금천군의 시골에서 시장 거간꾼이었던 부친과 독실한 신자였던 모친 사이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13세 때부터 교회 종각에 올라가 여러 시간 기도하는 등 일평생 기도의 삶에 헌신하였다.
1914년 고향의 시변리 공립보통학교를 졸업, 1915년 개성 한영서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다섯 번 체포되어 네 차례 구금되었다. 1923년 8월 출옥하여 졸업을 위해 복학하였으나, 당시 교장이었던 왓슨(A.W. Wasson)은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이용도가 학교에 돌아오면 학교가 소란스러워질 것을 염려하여 협성신학교(현재의 감리교신학대학교) 입학을 권유하였다. 이용도는 3․1운동 이후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하여 고향에서는 더 이상 독립운동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목회자의 소명감 없이 1924년에 선교사들이 영어로 가르치는 영어 신학과에 입학하였다.
1925년 가을 폐병 3기 진단을 받은 이용도는 급우였던 이환신의 인도로 평안남도 강동으로 병 요양을 하러 떠난다. 그곳에서 작은 교회의 부흥회 인도를 요청받았는데 예배를 인도하던 중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병세도 호전되었다. 복학하여 학업을 마치고 1928년 1월 28일 감리교단에 의해 강원도 통천구역으로 파송 받는다. 파송 이듬해에 자신의 구역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성령의 강한 역사가 있었다.
이후 부흥사의 삶을 시작한 이용도는 조선교회에 예수의 생명이 없음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30세의 젊은 나이에 전국적인 부흥사로 명성을 얻었던 그는 평양지역의 장로교 목사들에 의하여 신비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고 1933년에 감리교 중부연회에 의해 강제 휴직 처분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33년 10월 33살의 나이에 폐병으로 생을 마감한다.
한편 감리교단은 1998년 서울연회에서 이용도 목사의 신학이나 사상에 문제가 없었음을 심사하고 그의 모든 직위를 뒤늦게나마 복권하였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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