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요 12:1~8)
42. 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요 12:1~8)
  • 주성호
  • 승인 2015.10.20 09: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불과 동쪽 3km의 거리에 위치한 베다니에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 3남매가 살고 있었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가정으로 평소에도 잘 들리셨고, 수난 주간에도 낮에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시다가 저녁이면 베다니의 그들의 집에 가셔서 쉬신 집이기도 하다.
특히 언니인 마르다는 헌신적이어서 음식을 잘 준비해서 예수님을 대접하기를 좋아했고 동생 마리아는 언제나 예수 곁에 앉아 말씀듣기를 좋아했다.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장단점을 가지고 비교하며 함부로 평가하기도 하는데 음식을 대접하는 것도 중요하고, 또한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에서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 할 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2)는 말씀을 하셨는데, 더 좋은 선택은 신앙생활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 한다.

첫째: 마르다의 신앙

1) 책망 받은 마르다(눅 10:38~42)
예수께서 제자들과 베다니에 들어가셨을 때 마르다는 예수와 그 일행을 자기 집에 영접하고 극진한 사랑의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려고 정신없이 바빴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언니를 돕지 않고 주님의 발아래 앉아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었다.
사실 언니의 입장에 선 자기는 너무도 바쁜데 도우려 하지 않고 노는 것만 같아 마음이 언짢았던 것이리라.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께 마리아에게 놀고만 있지 말고 자신을 돕도록 명해 줄 것을 부탁했는데,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하면서 오히려 마르다를 책망하셨다. 이럴 때 마르다는 마음이 몹시 상했을 것이고 반면에 마리아는 통쾌하게 여기면서 여자들이 흔히 가질 수 있는 묘한 마음가짐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손님을 초청하고 음식을 잘 대접하려는 것은 당연하고 잘못된 것은 전혀 아니다.
눅10:41~42에서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입장에선 음식 대접이 과히 중요하지 않고 그의 말씀 들어주는 것이 그를 더 대접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계셨다.
그런데 마르다에게 문제가 있다면 오로지 음식을 잘 대접 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그의 마음을 분주하게 하였기 때문에 마리아를 책망한 것이다. 주님을 위한 명목으로의 봉사도 중요하지만 주님은 말씀을 듣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더욱 원하시고 기뻐하신다.

2) 확신 있는 신앙(요 11:21~27)
나사로가 병들어 누웠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사람을 보내 예수께 사실을 알리고 예수께서 오라비의 병을 낫게 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급히 나사로를 찾지 않으시고 이틀이 지난 후 그곳을 떠나 베다니에 도착 하셨고, 그때에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때였다.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한다(요 11:21). 이 말은 연락을 했는데도 제 때에 오시지 않았다는 원망도 아니고,그렇다고 하여 마르다가 이제라도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릴 수 있다는 확신에서 나온 말도 아니다(22, 24,39절).
다만 예수께서 오심으로 마르다가 설움에 복받쳐 사무치는 슬픔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었다. 주님이 이곳에 계셨더라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손을 써 오라비가 죽지 아니했을 것이라 확신했던 것이다.
22절에서는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 다음 전개되는 대화로 간단히 알 수 있다.
"네 오라비가 살리라."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7절의 마르다의 신앙고백을 들어보면.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부활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으나 사두개파는 부활을 반대하고 있었다(행 23:8). 고로 마르다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산다고 했을 때 종말론적 부활을 상기시키는 조문 인사쯤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묻혀있는 무덤을 찾아 가셔서 기도한 후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 가까이 다가가 돌을 옮기라 하시고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예수의 명령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권위적임을 보여주었다. 이로서 마르다는 처음 주님을 뵈었을 때 오라버니의 일로 원망과 불만스럽게 말하였으나 확신하는 신앙으로 신앙고백 하는데 이르렀다.
예수의 역사는 슬픔을 당한 마르다와 마리아 가정에 기쁨을 안겨 주었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말씀을 그대로 입증하셨다. 그러나 요 12:10~11에 보면 당시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부활을 거부한 사두개인들은 예수는 물론 나사로까지 죽일 음모를 하게 되었다.

둘째: 마리아의 신앙

1) 향유를 부은 여인(요 12:3~8)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날 때마다 그의 발밑에 앉아 말씀 듣기를 좋아하므로 '발 밑의 여인'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예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오셨을 때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예수의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닦아 드렸다. 보통 향유가 사용되는 경우는
① 기쁨이 넘치는 자리
② 속죄에 대한 감사의 의미
③ 장사 지낼 때 시체에 방부제로 사용되곤 했다.
마리아의 향유 사건은 오라버니 나사로가 다시 산 기쁨과 유월절 엿새 전이므로 예수께서는 장사를 위한 것이라(7절) 말씀하셨다. 또한 마리아의 행위는 진정한 헌신과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드 한 근은 300 데나리온이라고 했는데 5,000명 이상을 먹일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다(막 6:37~마가가 200데나리온이 필요하다 한 것을 보라). 마리아에게는 예수에게라면 아까운 것도 없고 무엇이든지 다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제자 중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비난 하였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게 들릴 것이다. 발에다 부어 허비하는 것보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구제함이 마땅히 여기게 될 것이나,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은 30에 넘겨줄 정도였던 가룟 유다로는 6절의 말씀대로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2) 예수의 칭찬(마 26:6~13)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의 구제에 결코 무관심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가난한 자의 구제의 기회는 언제든지 있는 것이고, 마리아에게 있어선 한 번의 주어진 기회를 가장 선용 한 경우로 평가하셨다. 기회란 항상 우리에게 열려있는 것 아니라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는 것도 신앙생활 잘하는 방법 이다. 마태복음엔 제자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하시며 오히려 그의 사랑과 신앙적 행위에 대해 칭찬하셨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동의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때로는 의지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할 때가 많다.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도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을 듣고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였기 때문에 칭찬은 물론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대접은 마르다와 같이 음식보다는 말씀 듣기를 원하신다.
롬 12:1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는데, 마음으로만 아니고 물질, 몸까지도 주님의 사역에 온전히 쓰이기를 원하고 계신다. 우리는 주님께 감사의 향유를 붓고 있는가? 우리의 몸으로 주님을 위해 어느 정도의 헌신의 생활을 하고 있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