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부머’ 우리세대가...
‘베이비부머’ 우리세대가...
  • 김홍술
  • 승인 2015.05.22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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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술 목사와 방인성 목사의 40일 단식현장 그후...(12)

10월에 접어드니 날씨가 제법 쌀쌀해 졌다. 한여름에 올라와 반바지 차림으로 시작했는데 완연한 가을로 들어서니 날씨도 그렇지만, 긴 단식에 체력과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 내의와 점퍼로 무장해도 아침저녁으론 추웠다. 게다가 난 4일 아침부턴 물도 끊고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기에 아침부터 종일 주변에서 걱정이 태산이다. 물이 들어가지 않으니 소변도 안 나온다. 혈압은 아직 이상이 없는데 혈당이 문제였다. 조계성 원장은 이날 토요일이라 아예 이곳으로 출근을 했다. 어제까진 하루 오전 오후 두 번 건강 체크를 했으나 오늘부터 나만 한 시간 간격으로 당 검사를 하겠단다. 조 원장은 당이 70 이하로 떨어지면 뇌로 공급이 안 되어 생명이 위태로울 뿐 아니라, 생명을 구한다 하여도 의식이 중지되는 동안 뇌가 손상을 받아 큰 장애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경고를 한다.

마침 두 번째 방문 온 유민아빠 영오씨가 주치의였던 동부시립병원 이보라 과장과 동행해 도착했다. 이 과장은 나의 ‘절대단식’ 소식을 듣고 아예 포도당 링거를 준비해 왔다. 그리곤 영오씨도 40일째 날 당이 떨어져 의식을 잃어 쓰러졌다고 하면서 위험수치에 다다르면 반드시 링거를 맞아야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두 의사에게 나의 의식과 의지가 있는 한 주사는 받지 않을 것이며, 의식이 꺼진 직후에는 의료진에게 몸을 맡긴다고 하였다. 나의 강경한 입장에 모두들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발만 동동 구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방 목사와 나는 우리를 염려해 찾아와 준 이 과장이 고맙기도 했지만, 오히려 김영오씨의 주치의를 자원해 되받는 언론의 악성 모함과 여당 정치인들의 공격에 대해 염려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원이기도 한 이 과장의 의연한 자세를 치하하기도 하고 꿋꿋이 이겨나가자고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혹시 동부시립병원에서는 우리가 단식을 끝낸 뒤 그 병원으로 입원할 것으로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녹색병원서 모시겠다는 통보를 받았기에 우린 이 과장의 방문에 약간의 미안함이 있기도 했다.

실은 앞서 광화문 집행부와 여러 번 논의를 가진바있었다. 특히 나의 의식이 혼절되는 순간 어떻게 어디로 옮기느냐가 문제였다. 의식의 불이 꺼진 후 7분~10분이 지나도록 당 공급이 중단되면 심각한 뇌손상을 동반하기에, 일단 포도당 링거를 주사하고 이동하되 어디로 갈 것인가도 중요하였다. 가까운 대형 의료기관들의 응급실은 신속히 도착할 수 있어 응급처치 상 좋지만, 우리의 단식 정신과 공감이 되는 의료기관을 알아본 결과 녹색병원에서 흔쾌히 받아주기로 했다는 거다. 들어본 녹색병원은 각종 민주민생 그리고 평화통일 투쟁현장에서 응급사고가 발생할 시 도맡아 봉사해 온 의료기관 임을 알게 되었다.

이날 우리 둘은 평소보다 좀 늦게 사우나를 찾았다. 단식기간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가장 편안하고 아늑한 시간이다. 두 명의 자원봉사자가 휠체어를 밀고 동행했다. 한 명은 인터넷신문사를 운영하는 김 아무개 대표이시고 다른 한 분은 젊은 임 모 목사였는데,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도와주는 게 너무 고맙기도 미안키도 했다. 목욕탕 안에서도 일거수일투족 근접보호와 앙상하다시피 빠진 우리 둘의 몸까지 씻어주며 안타까워했다. 김창규 목사는 탕 안에 들어와 내 등과 배를 만져보더니 ‘아이고, 등가죽과 뱃가죽이 붙는다더니 정말 붙었네!’ 하며 놀란다. 그 두 봉사자는 우리 둘이 다 씻고 안락의자에 앉아 쉬는 것을 보고야 자신들의 목욕을 하였다. 나는 몸무게가 59킬로로 17킬로나 빠졌는데, 야윈 몰골을 찍어놓고 싶어 주변의 눈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휴대폰에 담았다.

오후에는 고교친구 고 아무개가 부부동반 나란히 나를 찾아 줬다. 친구는 30여일 째 되는 날도 내외가 불쑥 찾아오더니 이날도 일부러 왔단다. 오랫동안 ‘슬로우푸드’나 ‘자연의학’ 운동에서 깊은 소명의식을 가진 친구 부부는, ‘디톡스 건강과 치유’ 방면에 조해와 전문가로 활동해 왔었다. 나와 몇 번 대면과 짧은 대화에서도 서로 관점과 말이 통했다. 사실 추억과 우정의 40여년 고교 동기들 모임에서 그간 쌓아온 우애가 최근 요동을 쳤고 결국 사달이 났었다. 동기들의 카톡방이 ‘서울방’과 ‘부산방’이 따로 있었는데, 내가 세월호 단식에 돌입한 이후 서울방의 동기들이 각을 세우고 ‘왜 나라를 흔드냐?’느니 ‘홍술이 니도 좌경 운동권이었더나?’하며, 급기야는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인하면 아예 북으로 가서 살아라.’ 하더니만 카톡방에서 ‘왕따’도 성에 안차 필경 다른 카톡방을 만들어 모두 나가버리는 사태까지 갔다. 세월호에 공감하고 나에게 조용히 찾아오거나 개인문자로 응원하는 친구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베이비부머’ 우리세대가 반공수구에 콘크리트라더니 이렇듯 확실히 경험하고 보니 참으로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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