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짐이 짐 되고 말았다...
결국 짐이 짐 되고 말았다...
  • 김홍술
  • 승인 2015.05.17 22: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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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술 목사와 방인성 목사의 40일 단식현장 그후...(11)

9월 27일 오후 5시 시청 광장에서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촉구 국민대회가 열렸다. 방 목사와 나는 다소 먼 거리지만 걸어서 참석하기로 했다. 광장 잔디밭에는 전국 각지에서 참가한 사람 1만 여명이 꽉 차 있었다. 우리기 도착하자 서울뿐 아니라 지방서 오신 분들 중 아는 분들이 알아보며 인사를 해오고 사진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리 두 목사는 진행팀의 요청으로 단상 뒤편으로 안내 되었고 대회 진행 중 단상에 올라 인사와 발언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방 목사가 대표로 인사말을 하기로 하고 단상에 올랐다. 우린 부축을 받으면서 지팡이를 짚고 올라가 단상 가운데 섰다. 방 목사의 인사말이 시작되었는데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은근 걱정스럽기도 했다.

방 목사는 중간 중간 울먹이면서 ‘저희가 34일, 32일 단식하는 동안에 21세기 한국 사회가 어떠한가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야만적이고 비극적인 사회, 약자들이 억압받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어찌 성직자로서 목숨을 내놓고 헌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국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청년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사회를 바꾸어야 합니다. 진실 규명은 정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정의를 세우는 것은 정직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정직은 진정한 힘입니다. 대통령과 청와대여, 정직하십시오. 새누리당이여, 정직하십시오. 정직이 힘입니다. 정직이 신용입니다. 정직이 축복입니다. 정직이 경제를 살리는 길입니다. 세월호 진실 규명 없이는 경제가 살아나지 않습니다. 속지 마십시오.’하고 외쳤다. 30일 이상을 굶고 어디서 저런 우렁찬 소리가 나는지... 아니, 오늘 저녁이 은근 걱정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방 목사는 끝내 발언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오는데 휘청이면서 주저앉을 뻔 했다.

보름여일 전부터 밤사이 일어나 소변을 해결하러 가는 게 너무 벅차 패트 병 하나를 요강으로 삼았던 터라 아침이면 도우미 후배들이 비워 준다. 가지고 나가는 그것을 보니 둘의 소변 양이 많이 줄었고 색깔도 노란색이 진하다 못해 붉은색에 가깝고 냄새도 고약하다. 도우미 동지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그리고 걷는 게 위험하다고 휠체어 두 대를 준비해 놓고 움직일 때면 의례 밀고 다녀서 환자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낮에는 방 목사와 번갈아 가면서 텐트 안으로 들어가 누워서 휴식을 가지기로 했다. 도우미 동지들이 등 떠밀며 성화를 대기 때문이었다. 오는 내방객들을 30일이 넘도록 맞이하고 이야기 나누고 하는 게 즐겁고 기쁘지만, 저녁이 되면 기진하여 일찍 드러누워 잠을 청해야 했다.

이윽고 10월 3일 개천절, 하늘이 열리는 날 아침이 밝았다. 이날은 나의 단식 40일째 되는 날, 여느 날처럼 우리 둘은 6시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서로 단잠 잘 잤느냐고 인사를 나눴다. 번데기처럼 침낭 속을 빠져 나오면서 잠시 앉은 채로 감사와 오늘 하루의 날을 기도해 본다. 아, 40일을 왔다니... 하늘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설명이 될까? 세월호 가족을 이어 동조단식에 나선 동지 목사의 결사각오 길에 페이스메이커로 함께 뛰겠다는 게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하늘 아버지여, 부활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듯이, 한반도 바닥을 치는 곳 세월호에 오신 예수를 다시 만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죽음으로 부활을 얻듯 40일간의 죽음으로 우리의 몸과 영혼을 새로 만들어 부활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새로이 당신으로부터 받은 몸과 영혼은 세월호 이후의 조국과 교회를 위해 바치는 제물이 되겠습니다. 자본과 거짓에 맞서고 불의한 권력과 평화에 저항하며 싸우겠습니다. 의의싸움, 선한싸움에 평화의 전사로 살겠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버림받은 영혼들과, 억압과 폭력에 고통당하는 자의 자리에 함께하겠습니다. 자애로우신 손 내밀어 주시고 이끌어 주소서. 아멘.’

텐트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밖의 소리가 좀 달랐다. 얼굴을 내밀고 나오니 J 목사와 동행하여 왔었던 한 자매가 너무 아름답고 푸짐한 꽃다발 두 개를 준비해 왔다. 이미 방 목사가 받으면서 여러 주변 사람들의 축하 박수를 받고 있던 차였다. 그 자매는 내가 나오니 나에게도 환한 미소와 우아한 자태로 꽃다발을 안겨준다. 난생 처음 이런 꽃다발이 처음이었다. 또다시 박수가 터지면서 단식 40일 째날, 하늘이 열리며 조국의 탯줄이 끊어지고 첫 울음을 울던 날을 축하했다. 축하를 하고 받는 게 맞는 일인지 모르지만, 아마 모두들 우리 둘을 제단위에 올려놓고 세월호 이후의 국가를 앙망하는 환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오후 늦게 부산서 안현식 교수가 찾아왔다. 안 교수는 교회개혁운동에 열심이어서 부산서 몇 번 뵈었던 분인데 방인성 목사와 나를 만나러 일부러 올라온 모양이었다. 고맙게도 안 교수는 얼마 후면 내가 병원으로 또 부산으로 옮길 터인데 짐들을 꾸려 부치자고 제안해 주었다. 자신이 내려가면서 우리 ‘부활의 집’까지 부쳐 주겠다는 거다. 이런저런 짐들이 많이 늘어 챙겨보니 한 짐이다. 불과 40여일에도 덕지덕지 이런 짐들이 달라붙는데 인생 80평생 얼마나 붙은 게 많겠는가! 출발 한 날은 너무도 간출했었다. 방 목사와 나는 먹는 것도 물밖에 없어 뭘 먹을까 할 거 없고, 입는 것도 한 두 벌로 족해서 너무 좋다고 입을 모았었다. ‘아우, 김 목사~ 우리가 이렇게 씸플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지.’ 그랬었는데 방 목사와 나는 결국 짐이 짐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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