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들의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었으리라.
그 아이들의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었으리라.
  • 김홍술
  • 승인 2015.05.07 0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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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술 목사와 방인성 목사의 40일 단식현장 그후...(8)

한편 김창규 목사는 지난 87년 민주화 운동에 온 몸으로 저항운동을 하던 시절을 상기하면서, 지금이 바로 그때처럼 온 국민적 운동으로 나가야 할 때라고 흥분하였다. 그러면서 이곳 광화문에서 300명 기드온의 용사를 일으키자고 제안했다. 이에 방 목사는 오히려 세월호 참사가 난 4월 16일의 416보다 희생자 304명을 기리는 304의 상징성이 더의미가 있다고 했다. 이런 대화에 나는 광화문 광장의 1박 철야 기도회로 목회자 304명을 모집하자는 구체적 방안을 보탰다. 우리 셋의 이야기는 단박 의기투합이 되었고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명단을 목에 걸자고... 오늘 한반도의 죄악을 지고 간 희생자 아이들이 오늘의 예수로 고백하는 사건이 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현장에서 뜨겁게 제안된 우리 셋의 이야기는 삽시간에 두루 공명이 되었다. 그래서 주일이 지난 9월 1일 저녁에 20여명의 준비회합이 우리 단식천막에서 이뤄졌다.

우리 단식 현장에서 제안된 ‘304인 목회자 철야기도회’는 마음과 마음으로 울림이 되어 널리 전파되었다. 기존 조직단체와 평신도 리더로부터 약간의 크레임 제기도 없지 않았으나 비교적 은혜롭게 협력과 연대로 이어졌다. 복음주의적 운동성의 교회들과 진보적 성향의 교회가 각각 100명이상 200명이상 참여키로 논의가 끝나자 실무팀들이 꾸려지고 집회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불과 보름 여 만에 전국 방방곡곡에 입에서 입으로 SNS 소통으로 ‘모이자! 모이자! 광화문으로...’하며 서로를 두드렸다.

9월 15일 오후가 되자 각 지역별 교단별 목회자들이 구름떼처럼 모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고 저녁 8시가 되자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좌상 앞에는, 304명을 이미 초과하여 5~6백 명의 목회자와 신도들이 꽉 메워 앉았다. 목회자 대부분은 이미 약속한 대로 흰 가운에 보라색 스톨을 걸쳤다. 그리고 304명의 희생자 이름 하나 하나의 명찰을 목에 걸었다. 내게 온 명찰의 이름은 ‘정원석’이었다. 아마 단원고등학교 남학생인 것 같았다. 명찰을 꼭 쥐고 조용히 속으로 ‘원석아’하고 불러보았다. 뜨거운 눈물이 금시 고인다.

‘아!...’

제단 위에는 투박한 우리식 토기의 성찬용 잔과 그릇들이 나란히 진설되었고, 제단 옆 세워진 나무 십자가에는 노란 리본과 띠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와 방 목사는 차가운 밤기운에 담요를 걸치고 앞줄에 앉았다. 여는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광화문 광장을 덮고 있는 뜨거운 기운을 느낀다. 간간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떡과 포도주를 받으러 나오는 긴 행렬들...

그 떡을 받아 포도주에 적셔 입에 넣고 목을 넘기려 할 때, 누구나 하나같이 목이 메었으리라. 그 아이들의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었으리라.

우리 두 목사는 예배 후 여러 동지 목사들에 등 떠밀려 단식천막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광장에 머물렀다. 밤을 꼬박 새워가며 기도하는 304인의 이 시대의 ‘적은 무리 목회자들’이 그나마 눈물겹게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강원도 산골에서도 오고 전남의 어느 섬마을에서도 왔다. 충청북도 내륙의 시골에서도 왔고 제주도에서까지도 날아왔다. 모두 한결같이 작은 교회들의 목회자들이었다. 그냥 있을 수 없어서... 함께하고 싶고,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하려고 왔을 거다. 우린 그렇게 긴 긴 밤을 보냈고 새 아침을 맞았다. 9월 16일 아침이었다. 세월호가 맞이한 4월 16일로부터 딱 5개월이 지난 그 아침을 맞았다. 아, 추위와 허기진 밤을 지샌 광화문 광장은 후일 ‘통곡의 광장’으로 기억될 것이다.

11시 결단의 예배에 우리 두 목사는 다시 합류하였다. 16시간을 꼬박 지켜준 동지들에게 미안한데 오히려 우리를 염려해 준다. 따스한 가을 햇볕이 간밤의 차가운 바람을 몰아내고 광장을 포근히 감싸주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참가자들은 서로서로를 꼭 안으며 손잡으며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돌아가야만 했다. 눈물짓는 유가족과 우리 두 목사를 남긴 채 가는 걸음들이 못내 아리랑이었으리라. 결코 잊지 말자고... 기어이 특별법을 제정하자고... 다짐하고 가슴에 새기고 맹세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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