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목사 회갑 생일을 맞은 날
방 목사 회갑 생일을 맞은 날
  • 김홍술
  • 승인 2015.04.26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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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술 목사와 방인성 목사의 40일 단식현장 그후...(3)

방인성 목사는 나보다 이틀 뒤인 8월 27일 들어왔다. 그리고 이튿날 28일에 우리는 김영오씨가 병원서 단식 46일 만에 단식을 중단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다행이었고 방인성목사가 40일 단식을 이어가는 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절묘했다. 이날 더욱 흥미로운 건 방 목사의 60회 회갑 생일을 맞은 날이었다. 방 목사는 ‘회갑 선물치고 너무 감격스런 선물을 유민아빠로부터 받은 거다.’며 기뻐했다. 한편 방 목사의 주변 지인들은 이날 급조하여 단식장 부스 방에 모여 조촐한 회갑 감사예배를 준비하여 함께 했다. 이정배 교수는 격정적인 설교를 통해 은혜의 자리로 이끌었고, 원로 조화순 목사는 방목사와 나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사랑과 눈물의 축복기도를 빌어 주었다. 8순을 넘긴 조 목사는 단식에 함께하지 못하는 마음을 너무 미안해하시면서 매일 찾아와 곁을 지켜주며 함께 기도하시겠다고 다짐하였다.

다음날 단식 5일째 되는 이날 나는 방 목사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40일간의 먼 마라톤 코스에 외롭고 힘들 터인데 내가 동행하며 같이 뛰어도 되겠느냐고... 방 목사는 여부가 있느냐며 너무 고맙다고 반색하면서도 걱정스럽고 미안스러워 했다. 그리고 원래 마라톤 레이스에 ‘페이스메이커’가 있는데 ‘김 목사가 페이스메이커가 되는 거다.’며, 페이스메이커가 선수보다 앞서는 적도 있다고 했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눈물과 애통에 잠겨있는 유가족의 아픔에 동참하고, 유가족이 원하는 세월호 특별법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기도의 동행을 약속했다. 김창규 목사는 주일은 청주의 교회에 내려갔다가 다음날 곧장 올라와 우리 둘의 곁을 함께했다. 다른 열 명의 행동단원이 미안해하는 마음을 대신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나는 일주일간이나 늦어도 2주 안에는 마치고 부산으로 내려가려 했었는데, 마음에 오는 어떤 움직임이 처음 올 때 계획을 밀어버 렸다. 부산의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 ‘부활의집’에는 연약한 형제들 6명이 나만 보고 추석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 작은 형제들을 제치고 더 우선해야 하는 비중이 세월호 기도 단식에 있다는 걸까? 그 날 나에겐 고민과 갈등이 다시 밀려왔다. ‘부활의집’은 상경하는 날부터 엄청난 집중호우가 쏟아져 집 뒤편 높은 공원의 토사가 밀려 내려온 사태가 벌어졌다고 소식이 왔었다. 공원, 구청, 소방서 등에서 찾아오고 식구들은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는 모습이 선하였다.

아, 세월호에 희생당한 304명 통한의 영혼들이 구천에 떠도는데... 그 생때같은 소년소녀 260여명이 엄마아빠 부르면서 버둥거리다가 뜨거운 피 토하지도 못하고 숨 앗겨갔는데... 건국 이래 이런 애통하고 참혹한 역사가 있었던가? 대한민국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 중 그 어떤 슬픈 사연을 안고 사는 사람이라도 비켜갈 수 있단 말인가? ‘부활의집’의 지극히 작은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아픈 생을 잠시 양보해 다오! 오늘은 십자가의 예수가 그대들로부터 나와 진도 앞바다에 수장되었으니 나 그 예수를 뵈러 가리라! 21세기 반 조각 조국 대한민국에 이렇게 오신 예수를 나 만나리라! 그리고 물어보리라!

아, 우리 대한민국이 그 짧은 반세기 만에 정녕 부자가 되었단 말인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으로 부상한 놀라운 성장으로서 배고픔과 헐벗음으로부터 벗어났으니 그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과연 ‘세월호’와 ‘청해진 해운’은 대한민국의 축약판이었다.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야수가 되어버린 ‘졸부’ 대한민국이었다. 일찍이 예수가 묻기를 ‘하느님을 택할 건가 재물을 택할 건가’ 했었는데, 우린 이미 재물을 택하였다. 진실이요 정의요 생명인 하느님보다 물신인 자본을 택하였다. 잠시 진리와 양심과 도덕을 덮어두고 이익과 국익을 택했다. 그래서 저 ‘청해진 해운’처럼 자본과 종교와 권력이 환상의 삼합을 이루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평범한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다. 열심히 일하여 가족과 함께 단란한 행복을 누리고 싶은 민중이었다. 이렇게 자본주의 세상이 천박하게 폭삭 내려앉아버린 대한민국에, 왜 하필 그들이 선택되어 그 목숨 그 아깝기 그지없는 아이들의 생명까지 제단위에 바쳐야 했을까? 결코 원하지도 않았던 순박하기 그지없는 민중들과 그들의 새순 같은 아이들이 왜 그 추악한 죄의 짐을 져야한단 말인가?

자본과 종교와 권력이 영악하게도 민중들을 착취하고 마취시키며 갈취해도 몰랐다. 민중은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에 내몰렸고 먹이사슬에 꽁꽁 묶여서 구조화되어버린 세상을 만들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동조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민중으로서 미안함을 너머 깊은 죄의식과 공황에 헤매고 있다. 한때 깨어있는 양심들이 민주주의와 정의평화를 위해 저항하다 고난을 받았으나, 달콤한 권력과 자본의 유혹에 재갈이 물려져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아, 참으로 원통한 역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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