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넘어야할 선교 에픽 감리교회
[에피소드] 넘어야할 선교 에픽 감리교회
  • 이길극
  • 승인 2013.11.17 21: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부연회 동춘감리교회 이길극 목사의 한목이야기

우리 한국감리교회는 우리 한국민 봉사와 개신교회 형제교단들의 선교 초기 사역에 협력한 공로가 지대하였다. 1884년 6월 23일 한국에 도착한 맥클레이는 한국감리교회를 위하여 선교부지를 준비하였으나 실상은 3개월 늦은 1884년 9월에 도착한 장로교회 알렌과 장로교회 선교부지 마련에 도움을 주었다.

그 뒤 130여 년 지나서 오늘에 보니, 1902년 아펜젤러(44세)와 1907년 스크랜턴(51세)의 한국 초기선교사역에 있어서, 왕성하고 원숙해지면서 선교비전이 가득한 실현 의지가 조금 더 오랜 세월을 우리와 더 함께 하였으면 하고 무릎을 친다. 더군다나 그들의 감동과 감격과 긴장과 스트레스가 서려있었던 학교들과 병원들과 교회가 감리교회로 지금이라도 돌아올 가능성이 겨자씨만큼이라도 발생하는 계기가 발생하여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라인으로 돌아오기를 이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께 기도드리게 된다.
오늘날 감리교회 선교와 상관이 없어진 사람들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은 조선을 강점하였던 일제와 무엇이 다른가. 지금도 일제 잔재의 후유증이 남아있지만 과거와 현재를 비견하여 감리교회 미래가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안정될 것이며 발전할 것인가 우리 모두가 숙제를 받은 상태이다. 정당하게 해결하여서 신앙 선조들의 열정을 되이어 다시금 더 좋은 열매를 맺어가져야 할 것임이 분명하다.

▲ 스크랜턴의 넓은 마음의 선교적 은덕을 본 선교사들 아펜젤러, 알렌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3시 제물포에 상륙하였던 아펜젤러 부부 선교사는 4일후 인 4월 9일 제물포에서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 여파를 의식하여 일단 퇴각하면서 주님께 호소한 기도이면서 선교보고서 중에 짧지만 오늘까지 ‘에픽’이 된 다음의 아펜젤러의 문장을 본다. ' We came here on Easter. May He who on that day burst asunder the bars of death, break the bands that bind this people, and bring them to the light and liberty of God's children! ' 아펜젤러는 4월 13일 나가사끼로 철수하였다.

한편 스크랜턴은 아펜젤러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출항하여 1885년 2월 27일 일본에 도착하여 맥클레이와 회동하였었지만, 한국내 불안한 국내정세 상 일본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선교전략상 아펜젤러부부가 선발대로, 스크랜턴 일가는 후발대로 한국에 상륙하기로 하여 2개의 선교팀이 구성되어 스크랜턴은 4월 5일 제물포에 아펜젤러부부와 함께 오지는 않았다. 아펜젤러부부를 먼저 한국에 떠나보내었던 스크랜턴은 언더우드가 미혼이어서 입경하는데 거침이 없었던 것을 참고하게 된다. 스크랜턴은 드디어 단신으로 1885년 5월 3일 제물포에 상륙하여 20일간 체류한 후 서울에 5월 22일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오히려 아펜젤러보다 먼저 서울에 도착한 스크랜턴은 넓고 큰마음으로 한국감리교회와 일본에 대기하고 있는 스크랜턴가와 아펜젤러 부부를 위하여 궁궐 옆 정동에 독립가옥 두 채가 딸린 1,800여 평의 대지를 사들여 장차 거둘 선교의 열매를 위하여 복음의 씨앗을 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의료선교사답게 병원을 준비한다. 정동 시병원의 기초다. 아펜젤러도 스크랜턴이 마련한 땅 옆에 결국은 학교와 교회 부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맨 앞에서 있다는 것, 첨단에 서있다는 것은 온갖 인간사의 바람과 저항을 받는 것이니, 예수 안에서 형제인 아펜젤러와 두 살 위 형님같은 스크랜턴도 그러하였다. 아무래도 형님이 아우를 감싸주는 것이 보기가 좋은 듯하다. 어떤 면에서는 스크랜턴의 행동과 아펜젤러를 이해할 때에 의좋은 형제를 생각해보면 어떨지 자문한다.
스크랜턴은 정동 병원을 고종22년(1885년) 9월 20일 개원하였고, 이후 개축한 병원은 이듬해 1886년 6월 15일 고종 임금님으로부터 시(施)병원 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아펜젤러 역시 1885년 8월 3일 정동에 개교한 후 이듬해 1886년 6월 8일, 임금님의 배재학당(培栽學堂) 학교명을 사액현판(賜額懸板)으로 받았다.

교육선교사 아펜젤러와 의료선교사 스크랜턴은 모두 일제의 조선 강점 속셈을 드러내는 초기에 한국민과 함께 하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일제 선박 충돌로 1902년, 스크랜턴은 1907년 해리스 감독과 충돌로 감리교회 초기 이 두 선교사들의 선교열정과 의기가 수장되고 정지되고 말았다. 1907년 6월 18일부터 26일 조선연회까지 감리사이면서 사회자로서 서울과 제물포 지방 업무사항을 보고하였던 스크랜턴이었다. 그러나 다음해 1908년 3월 11일부터 17일까지 열린 조선연회에서 존스 감리사는 지난해 1907년 연회 이후 서울과 제물포 지방회 업무보고 하면서 스크랜턴의 사직을 언급하고 있다. “No new workers have come to take the place made vacant by the resignation of Dr. Scranton and the transfer of Mr. Cable to Kongju.” 지난해 1907년 6월 18일 사회를 하며 지방사업 보고까지 한 스크랜턴을 폐회일 6월 26일에는 해리스 감독이 스크랜턴을 파송하지 않은 것으로 1907년 6월 26일 파송 명단에 스크랜턴의 이름이 누락되어있다.

이에 앞서서 1906년 6월 13일 조선선교연회 시에 해리스는 을사늑약 체결을 반대한 엡웟청년회 해체를 명령하였다. 특히 상동교회 웹웟청년회의 전덕기는 스크랜턴에 의하여 교인이 되고 속장, 권사, 전도사를 거쳐 스크랜턴 후임으로 1907년 상동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는데, 스크랜턴은 전덕기 목사의 확실한 후견인이었다. 상동교회 엡웟청년회 출신 전덕기 중심으로한 당연한 반일 활동은 결국 책임자인 상동교회 담임목사이며 감리사인 스크랜턴의 1907년 사직을 가져오게 하였다. 해리스와 스크랜턴이 충돌한 것이다.

한국감리교회의 결정적인 이 두 선교전략가들에게 쐐기가 박히게 된 1902년과 1907년 선교 홍역 사이와 뒤에는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로 우리 한국민에게 다가왔다.

먼저 1905년 7월 29일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육군장관 W.H. 태프트 사이에 맺어진 비밀협약, 태프트-가츠라 밀약 또는 카츠라-태프트 밀약이 있었고, 같은 해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이어진다. 경술국치(庚戌國恥) 한일 병탄조약(韓日倂呑條約)은 1910년 8월 22일 조인, 8월 29일 발효되어 우리 민족을 얽어매었고 그 후유증들이 교파 분리와 국민감정 괴리와 휴전선이다.
일본은 한반도를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 밀약 합의하는 일본 대표 가츠라와 자리한 미국 대표 태프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1901~1909) 26대 대통령에 이어 27대 대통령(윌리엄 하워드 태프트,1909~1913)을 지내게 되는 데, 한국감리교회에는 이미 일본통으로 친일계 해리스가 한국과 일본 양국 선교 감독으로 1904년 총회에서 피선되어 있었다.

한편 스크랜턴 사직에 앞서서 먼저 소천한 아펜젤러를 생각하여 본다면, 아마도 그의 신앙과 인격 정신으로 보아 스크랜턴처럼 해리스 감독 관할 시기인 1904년 이후에 선교사역 중에 있었다면 아펜젤러 역시 스크랜턴처럼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이 무리일까? 감독의 행정지시에 불순종하였을까? 아펜젤러는 1896년 11월 21일에 독립문 정초식에서 국내외 인사들과 수많은 참석자들 가운데서 기도 순서를 맡았고, 자신이 설립한 배재학당 학생들은 애국가를 합창하였다. 아펜젤러는 이후에도 엡웟청년회, 협성회,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등에 적극적 주동자로 등장하게 된다. 당연히 부상하고 있던 친일인사들에게는 아주 불편한 감리교회 지도자로 보인 것은 당연지사였다.

한국감리교회에 치명적인 해악을 준 해리스는 누구인가. 해리스(1835-1921)는 1873년 미국 감리회의 일본 개척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일본 홋카이도 하코다테에 감리교회를 세웠으며, 우치무라 간조 등의 일본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후 동경에서 미국 서부연안으로 이주한 일본인 선교도 하며 30여년간 선교 활동 중에 이미 일본 인사들과 폭 넓은 교분을 나누고 있었다. 1904년 미감리회 총회에서 해리스가 한일 양국 선교감독으로 피선되어 내한하여 1916년 은퇴하기까지 일본과 한국을 오갔다. 이렇게 친일 성향의 해리스는 한국 교회가 일본 교회와 일제에 협조하도록 하는 압력 처사를 가하면서, 1907년 스크랜턴이 한국감리교회 선교 좌절의 직격탄을 맞게 된 것이었다. 파울러 감독은 스크랜턴에게 감리교회 목사안수하여 선교사로 한국에 보냈으나, 해리스감독은 스크랜턴에게 감리교회 목사 선교사직을 내놓게 하였다. 한국감리교회 발전과 부흥을 저해한 해리스가 1921년 소천하고 이듬해에는 스크랜턴이 1922년 소천했다. 스크랜턴은 1907년 자신이 설립한 병원과 교회 있는 한국을 맴돌면 사역하다가 소천한 곳이 일본 고배이다.

▲ 스크랜턴 선교사가 1885년 9월 10일 개원한 정동 시병원과 개축한 시병원

소천 후이지만 그래도 스크랜턴은 오늘의 순복음교회에 초석을 제공하였다.
스크랜턴 소천 6년 뒤인 1928년 오순절교단(하나님의 성회 순복음교회) 최초 한국선교사가 되게 되는 메리 럼시는 입국하는 다른 선교사같이 정동 시병원을 숙소로 하여 이곳에서 엎드려 기도하며 선교의 초석을 준비한다. 이때에 스크랜턴 일가의 손에서 떠나고 있는 정동 시병원은 주인 없는 폐허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미국 감리교회의 럼시(Mary C. Rumsey)가 로스앤젤레스 부흥운동시기에 조선으로 가라는 음성을 듣고, 뉴욕 감리교계통 신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서울 정동에 도착하여 시병원 숙소에서 기도하면서 시작하였다 기록하고 있다. 럼시 내한 10년된 1938년 당시 정동 시병원 내에 오순절교단 선교본부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1938년 10월 5일, 영국 오순절교회 카타감독과 썽무라 목사가 목사안수위원으로 허홍, 배부근, 박성산 3인이 오늘의 순복음교회 최초목사가 배출되었다. 이 3인이 목사안수를 받은 곳이 정동 시병원이라는 순복음교회 자체 역사기록이다. 시병원은 스크랜턴 병원으로 정동제일교회 서쪽 오늘의 이화학교 자리이다.

우리 감리교회는 뜨거운 피와 눈물과 헌신과 정신을 지닌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등 수많은 감리교회 선교사은 우리 한국민과 형제 교단들 발전에 도움을 적지 않게 준 선교 에피소드들이 있다. 한국감리교회는 남 좋은 일만 해주는 사람처럼 타교단들만 그리고 오늘에 와서 일반사회인들의 배 불리게 하는 선한 에피소드의 감리교회일 것인가. 모든 형제 교단들과 함께 한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의 신앙과 정신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선교 정신이 있어야 함이 분명하다. 그러면서 원래의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가슴에 들어왔던 한국민을 향한 선교 소명을 제대로 견고하게 성취하는 선교 에픽 감리교회 되기를 소원한다. 그런데도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의 한국민 구원과 사랑을 다 이루지 못한, 한국식으로 말하면 선교의 한이 맺혀진 우리 한국 감리교회가 지금 또 홍역을 치루고 있다. 우리 한국감리교회는 당연한 권리를 빼앗겨 한 맺혀 사는 한국인의 또다른 역사의 단면이며 얼굴인가. 당당히 우리는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의 후예로서의 권리를 찾아서 그 의무도 감당해야 함이 분명하다. 현재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은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이 뜨겁게 그리고 고통 중에 죽어가며 선교하던 그때에 그 누구의 허리춤에나 있을런지.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에피소드 넘어서 선교의 에픽을 실현하는 주님의 몸 된 교회되게 하소서. (2013.11.9,극)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