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60
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60
  • 안양준
  • 승인 2024.09.18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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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의 「시편 사색」 속에서

C.S. 루이스의 「시편 사색」은 또다른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책이다. 다윗이 쓴 시편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아마도 시편이기에 잔잔한 선율과도 같은 평안함이 느껴지지 않을까? 하지만 루이스는 ‘시편 사색’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들추어 낸다.

무엇인가? 그가 다루는 주제는 ‘저주’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수준은 시 137:9의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는 구절이다. 한 번 상상만 한다 해도 너무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무리 원수의 자식이라도 해도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것을 바위에 메어친다는 표현은, 더구나 일반인도 아닌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이 아니 이런 기도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실제로 시편에 기록되어 있고, 이와 비슷한 내용의 말씀이 의외로 시편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루이스는 시편이 기록될 당시 이교도 문학에서 이와 같은 예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스, 라틴, 북유럽 작가들의 문헌에서는 음탕함이나 야만, 잔인함 등은 발견되지만 이들은 시편에 등장하는 파멸스런 저주에 비하면 오히려 나은 수준처럼 느껴진다.

이에 대해 루이스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도덕 세계에는 ‘더 높은 곳일수록, 더 위험한 곳’이라는 보편적 법칙이 있다고 한다. 가끔 외도도 저지르고, 자주 술독에 빠지고, 늘 이기적이고. 가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소한 사기를 치는 속인(俗人)들은, 높은 대의를 향한 열정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심지어 목숨까지 희생할 수 있는 사람과 비교할 때 분명 ‘저급한’ 인간일 수 있다.

그런 시각에서 정말 극악무도한 인간형은 위인이나 성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다. 대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말로 하면 대의를 위해 타인을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와 동일한 원리가 문학비평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가장 혹독한 비평은 문학을 사심 없이 사랑하는 사람, 문학에 매우 열정적인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을까?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 ‘깊이에의 강요’에 한 젊은 여인의 초대 전시회에 어느 평론가가 “당신 작품에는 재능이 보이고 마음에도 와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라는 평을 내놓았다. 그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여인은 논평을 곧 잊어버렸다. 그런데 며칠 후 그 평론가의 비평이 신문에 실리고 초대받아 나간 자리에서 뒤에서 들리는 소시를 들었다.

“그녀에게는 깊이가 없어요. 사실이예요. 나쁘지는 않은데, 애석하게 깊이가 없어요.”

짧은 글에서 그녀는 깊이가 없다는 사람들의 말로 인해 두문불출했고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평론가가 그녀의 죽음에 대해 쓴 글은 그녀를 무자비하고 집요하게 파고든 깊이에의 강요가 지나쳤다는 듯 이야기한다,

물론 이 글은 화가인 여인이나 그녀를 비평한 평론가 모두 처음부터 누군가를 해하려는 의도를 지니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믿는 신앙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독설의 저주를 퍼붓는 경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얼마 전 스페인의 카톨릭 종교재판소는 신앙을 바로 세우려는 의도로 한 순결한 여인을 고문한다. 이단성을 이유로 들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희생양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고야의 유령’이라는 영화에서 심문에 의한 자백은 허위일 수 있다고 하자 종교재판소는 심문에 의한 자백을 교회는 귀한 증거자료로 본다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신은 신앙이 있는 자를 어떤 환경에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도우신다는 것이다.

기독교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은 기독교가 역사 속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이들의 주장에 대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오히려 겸양의 자세를 보여야 마땅하다. 

그러면 루이스가 제시하는 저주의 시편에 대해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분명 시편의 저자가 보여주는 신앙과 악한 자들에 대한 심한 반감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어떤 작은 악이라도 용납하지 않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좋은 의미로 받아주실 것이다. 비느하스의 의분에 대해 누구보다 감동을 받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가 쏟아붓는 저주도 하나님 편에서는 충성 선언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이 이율배반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좀더 깊이 살펴보면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세상 가운데서 온갖 악을 자행한 자들의 행위는 결코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상대방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에 대해서 크게 생각지 않고 내뱉는 비평가의 말은 어쩌면 재갈을 물려야 할 필요가 있다. 

영화 ‘아고라’에 천문학자였던 히파티아를 잔인하게 죽인 키릴루스를 카톨릭은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과연 그가 성인일까? 움베르토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이단심문관들의 잔인함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실까?

물론 하나님만 아시겠지만 안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현세는 선악을 분별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대부분은 악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선은 존재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주님은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고 일곱 별을 오른 손에 붙들고 계신다. 일곱은 완전수요, 촛대는 교회요, 별은 교회의 사자이다. 일곱 중 두 개의 교회만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고 나머지는 책망을 받았다. 

심지어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었다고 하셨고, 나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토하여 내치고 싶다고 하시지 않는가? 그럼에도 그 모두를 교회라고 하셨고, 그 교회의 사자들을 붙들고 계신다. 단 주님이 말씀하시는 포커스는 이기는 자에게 있다.

겉으로 볼 때는 형편없이 당하고, 보잘 것 없는 자라도 신앙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길을 걷는 자가 있고, 그런 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부르짖는 기도를 주님은 응답해 주실 것이다. 그들의 눈에 세상은 자신을 넘어뜨리기 위해 온갖 공격을 퍼붓는 세력이요, 그들을 향해 내뱉는 저주는 주님이 들으시기에 의로운 기도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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