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 쿠쉬너의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는 꼭 필요한 책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해 보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이 문제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으리라 생각한다.
지난 번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을 통해 그리스도인인 정신 심리학자의 눈에 비춰진 악한 사람들, 아직은 ‘심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과학적 지식 체계가 없고 정신 의학 사전에 나와 있지도 않는, 그리고 성직자가 아니라 과학자이기에 ‘악’이라는 용어를 쓴다는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현주소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 책에서 “자연적인 악의 문제는 쿠시너(Harold S. Kushner) 박사의 책 「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선한 사람들에게 왜 불행이 찾아오는가)에 잘 다뤄져 있다.”고 하여 찾아 읽게 되었다.
해롤드 쿠시너는 600가구, 2,500명이 모이는 유대교회당의 랍비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고 서두에 ‘아론 제브 쿠쉬너(1963∼1977)를 위하여’라며 책을 쓴 특별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아론은 생후 8개월이나 지났는데도 체중이 조금도 늘지 않으며, 한 돌이 될 때부터는 머리카락마저 빠지는 등 이상한 기미를 보여 의사를 찾아갔고, 병명이 조로증이며 어린 나이지만 노인처럼 보일 것이고, 청소년기에 사망할 것이라는 설명을 듣게 되었다.
당시 젊고 경험이 없는 랍비로서 겪어야만 하는 슬픔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그날 느낀 것은 뭔가 불공평하다는 깊은 아픔이었다고 한다. 착하게 살아왔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르다고 생각하는 길을 걸으려 노력했고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경건하게 생활했는데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공정한 존재라면, 최소한 사랑과 용서를 베푸신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자신이 알게 되고 믿게 된 중요한 사실들을 글로 옮길 필요가 있었고 자신과 같이 곤경에 빠진 누군가를 돕기 위해 책을 썼다고 한다.
쿠쉬너는 이 책은 하나님이나 신학에 대해 요약한 것이 아니고 공연히 거창한 말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별 문제가 아니며 다만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역설하기 위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많은 이들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고통의 불공정한 분배를 문제삼는다. 선한 사람이 당하는 불운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 온유하심, 심지어 존재 여부도 의문을 제기한다. 환자의 회복을 위해 가족이나 이웃 모두가 합심하여 기도하지만 결국 희망이 헛되이 끝나버리는 것을 보게 될 때 ‘세상은 착한 사람의 편이다’는 생각이 무참히 일그러지게 된다.
이 책에서 쿠쉬너는 선한 사람이 당하는 불운에 대해 여러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이 책의 중심 논거는 그럴 때 신학적 지식으로의 접근이 결코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난은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이라거나 ‘우리 잘못을 치유하려는 의도’라는 설명에 만족할 수 있는가?
아들이 선천성 심장질환으로 수술 도중 사망했을 때 목사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시련인지 저도 잘 알지만 잘 극복하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때 어머니는 마음 속으로 “만약 내가 약한 사람이었더라면 아들이 아직 살아 있을 텐데….”라고 반응한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 스탠다드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욥기서이다. 욥의 친구들의 원래 의도는 진정으로 그를 위로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깨닫지 못했던 점은 자신들의 신앙이 고통 당하는 욥을 위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만약 하나님도 불가능한 것이 있다고 믿기 시작하면 그 순간 많은 좋은 일들이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선한 자들에게 다가오는 고통이 하나님이 그들의 잘못을 벌하려는 것이 아니고 불행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등장시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자연의 법칙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위협적이고 좋은 사람이나 유용한 사람을 예외로 삼지 않는다. 총알은 악성 종양이나 제 멋대로 달리는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이성을 갖고 있지 않고 그것이 좋은 사람도 병에 걸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상처 입는 이유이다.
욥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과 연민, 즉 자신이 좋은 사람이요 소중한 친구였다는 점을 스스로 확신하고픈 것이었다. 인간이 왜 죽어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호머가 쓴 「오디세이」에서 신적 존재인 칼립소가 오디세우스에게 매료된 것은 죽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 난 존재였기 때문이다.
또 당연히 나와야 할 주제로서 ‘자유의지’에 대해 말한다.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 창조의 최고봉으로서의 인간, 또한 에덴동산에서 죄의 결과로 주어진 고통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그것이 우리 삶을 고통스럽고 복잡하게 만들지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나쁜 선택도 가능하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들이 일어날까? 한가지 이유는 인간이 서로를 해칠 수 있을 정도로 악하며 이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게 지음 받았기 때문이며 그 자유를 빼앗으면서까지 하나님이 우리 행동을 저지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서 하느님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러나 그 일을 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우리의 이웃이 아픔을 당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굉장한 신앙 지식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의 아픔을 함께 할 수 있을까 하는 사랑의 마음이다. 내가 이러한 고통을 당한다면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심정이라면 조금이라도 나은 형편에 처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스스로 찾아내지 않을까?
이 책은 유대교 랍비가 쓴 책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은 결여되어 있음을 볼 수 있지만 신학적 지식을 넘어 현실의 아픔을 당하는 자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던 실패의 이유를 깨닫게 되고 좀더 따스한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점에서 꼭 필요한 책이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