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은 저자가 머리말에 쓴 것처럼 위험한 책이다. 그 이유는 정신과 의사로 개업한 그가 심리상담을 통해 엿보게 된 ‘악’이라는 개념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종교를 도입한 까닭이다. 책의 등장 인물들은 다양한 종류의 정신 질환을 앓고 있으며 이들의 외적 모습 이면에 숨어 있는 악의 세력, 인간을 병들게 하는 ‘거짓’의 존재에 대해 정체를 밝히고자 시도한다.
책에서 스캇 펙은 오랫 동안 불교와 이슬람교에 관심을 갖고 뭔가를 추구해 보려 애썼으나 결과는 늘 모호했고 뒤늦게서야 기독교의 본질을 깨닫고 거기에 온전히 귀의했다고 말하며, 자신이 기독교에 헌신했다는 것이야말로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실이며, 또한 총체적이고 전인격적인 것이라고 고백한다.
인간과 우주는 선의 세력과 악의 세력,
하나님과 악마 사이의 팽팽한 대결 속에 끼어있다.
이 대결의 전투장은 인간 개개인의 영혼이다.
인생의 의미는 전적으로 이 전투에 달려있다.
책의 서두에 써놓은 글귀는 저자가 바라보는 우주관이요, 인간관이다. 선과 악의 대립, 인간의 영혼 속에서 그들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고 말하며 그분은 악에 대해 무관하신 분처럼 생각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에덴에서 추방될 때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창 3:22)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선악을 아신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시는 것이 없으시나 하나님의 속성은 선하시며, 악을 미워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것이 타락의 원인으로 보여질 수도 있지만 아무런 의지도 없는 피조물은 하나님 역시 원치 않으셨다.
책 속에 두 번째 장의 제목을 ‘악의 심리학을 찾아서’라고 붙인 것도 정확히 말하면 아직은 ‘악의 심리학’이라고 부를 만한 인간의 악에 대한 정립된 과학적 지식 체계가 없는 까닭이라고 밝히고 있다. 왜 없는가? 악이라는 개념은 지난 몇천 년 동안 종교에서나 중요한 것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고 지금까지 과학적 모델과 종교적 모델은 서로 섞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악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과학은 악을 하나의 연구 주제로 이름 짓지 못하고 있고, 악의 이름은 정신 의학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예컨대 정확히 이름을 붙이기 전까지는 그 병에 대해 무기력한 상태이다. 설사 가능한 치료책을 갖고 있지 못하다 하더라도, 병명만큼은 알고 있는 것이 좋다고 한다.
실제로 의사들의 진단서에 병명이 ‘unknown’으로 표기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물론 현실적인 책임감에서 방어기제로 삼는 용어일 수도 있지만, 악이나 나아가서 영의 영역은 일천한 수준인 것이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책을 통해 악을 볼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사례들, 특히 바비와 로저의 경우 그들보다는 그들의 부모가 악하고 그들이 실제로는 치료의 대상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그들은 사회에서 정상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이의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여러 가지 방어 기제를 만들어 놓는다.
악과 직면했을 때의 상황에 대해 저자는 그들이 싫었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악이 혐오감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위험한 까닭에서다. 악과 너무 오래 마주하게 되면 그 악이 사람을 오염시키거나 파괴시키게 되어 있다.
저자는 어린 아들이 말한 악의 정의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아빠, ‘악(evil)’이라는 말은 ‘산다(live)’라는 말의 철자를 거꾸로 늘어놓은 거예요.”
악은 삶을 거스르는 것으로 죽음과 관련이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살인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은 사탄에 대해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한 자요”(요 8:44)라고 하셨다.
태초에 사탄은 모든 천사들 가운데 우두머리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탄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활동했고 교만해진 사탄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하고 반항했던 것이다.
축사의 과정에서 사탄의 표정을 잔뜩 머금은 환자가 매끈매끈하고 기름기 흐르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미워하지 않아, 다만 그를 시험할 뿐이야.”
우리가 그것에게 왜 그리스도를 반대하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이지.”
그러면 인간의 사랑이 왜 그렇게 못마땅하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사람들이 바쁘게 일하길 원해. 그러다 보면 싸움이 일어날 테니까.”
계속 더 물으려 하자 축사자에게 “너도 죽여 버리고 싶어.”라고 말했다.
저자는 축사의 과정을 주도한 것이 아니라 그런 과정을 본 것에 만족하며 그로 인해 사탄의 존재나 축사에 대한 실제성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럼에도 심리학의 분야에서 스캇 펙은 영적인 문을 두드린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악이나 영, 축사의 문제는 기독교가 존립하는 순간부터 존재해 온 것이다. 누군가는 신비라는 이름으로 감탄사를 남발하며 마치 헤엄치듯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려는 몸짓을 무시할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짧은 지면을 통해 많은 심정을 표출할 수는 없으나 원래 우리의 영역인 영적 세계에 대해 스스로 무지의 자리로 빠져버리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하는 현대 기독교에 대한 불편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제는 정신차릴 때가 되지 않았는가?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