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씨가 쓴 「칼레파 타 칼라」라는 소설은 ‘아테르타 비사’(祕史)라는 부제가 붙였졌는데 그 뜻은 “아름다운 일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출처는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이 나누는 대화 중에 “선생님.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는 속담이 맞나봅니다.”라고 한 말에서 인용한 듯 싶다.
기원전 44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위치한 아테르타라는 작은 도시국가는 두 나라의 장점만을 받아들여 평안을 누렸고, 지리적인 좋은 조건으로 경제적 부요도 누릴 수 있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반목으로 불편한 상황에 놓였을 때 티라나투스라는 인물이 등장하였다.
그는 뛰어난 외교 수완과 굽힘없는 용기로 집정관이 되었고 10년 가까운 치세 동안 아테르타는 큰 번영을 누렸다.
그러던 어느날 명망높은 수사학자 소피클레스가 새벽 미명 포세이돈 신전 주위를 배회하였는데 이유는 자신이 압제를 당하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으로 밤잠을 설친 까닭이었다.
언제부턴가 티라나투스가 절름발이라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고 그래서 이스토미 축전에서 그를 유심히 살폈을 때 실제로 절름거리는 것 같아 무심결에 옆 사람에게 말했는데 사내가 정색하며 “불온한 언동을 삼가라”는 것이다. 그 모습이 위압적이고 주위에 그와 비슷한 류가 여럿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고민 끝에 “아테르타 시민이여. 우리는 압제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탄식을 내뱉었고 높은 언덕에서 외친 까닭에 메아리가 되어 중턱에 사는 예민한 두 시민이 일종의 신탁처럼 받아들여 “그렇다. 우리들은 압제받고 있는 것 같다.”라고 합창하듯 화답했다.
이로 인해 시민들이 한두 명씩 광장으로 모여들었고, 티라나노스의 은갑대(銀甲隊)와 신성대(神聖隊), 그리고 상임정치위원 일부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신전경비대의 사관 하나가 온건히 해산을 종용한 것인데 오히려 시민의 분노를 사게 되고 갈등이 증폭되며 군중들 중 하나가 넘어져 피흘리는 모습에 흥분한 자들이 “티라나투스의 주구를 처벌하라. 참주를 타도하라.”며 외쳐댔고 신성대 대원들이 소요 현장에 출동하여 진압하기에 이르렀다.
무력에 강제 해산한 이들이 돌아가 자신들이 겪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결국 무장봉기가 일어나 티라나투스 저택에 쳐들어가고 폭도들에 의해 집정관이 목숨을 잃자 선동자가 달콤한 말로 무리를 달래며 새로운 지도자를 소개한다.
그는 티라나투스의 옛 정적으로, 음험한 야심과 무자비한 수단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후 아테르타의 역사는 한마디로 비사(悲史)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아테네는 아테르타의 정변을 이용해 할당금을 올렸고, 새로운 집정관은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였고, 스파르타는 약간의 식량과 무기를 대주며 새로운 집정관을 마치 자신들의 속관(屬官) 다루듯 한 것이다.
기원전 431년 여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지자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모스는 아티카로 가는 길목의 아테르타를 배은(背恩)의 죄를 물어 철저히 파괴하고, 살아남은 시민들은 코린트를 비롯한 인근 도시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 모든 일의 발단이 된 소피클레스가 아테르타의 소요가 어이없는 결과로 끝났을 때 한 말이 “칼레파 타 칼라”이다.
아테르타라는 도시국가는 역사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나라로 이문열 씨가 무슨 의도로 이 글을 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누군가의 선동에 휩쓸려 옳고 그름의 제대로 된 평가 없이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일의 경우 자신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을 수 있다는 교훈은 얻을 수 있다.
플라톤의 「국가」에 트라시마코스가 “진정으로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은 정반대로 불의의 지배를 받아서 강자인 통치자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행하고 통치자를 섬겨 그들을 행복하게 하지만….”이라고 한다. 정의와 불의에 무지한 결과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를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
과연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 망한 것일까? 그들이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지키지 않아 망한 것인가? 아니다. 지식이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뜻과 상반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호 4:7)
번성하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번성할수록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은 그 영화가 욕이 될 것이다.
현재 한국은 양대 진영의 극단적인 논리에 온 국민이 시름을 앓고 있다. 한때 많은 독자들이 이문열이나 이인화, 김훈, 시오노 나나미와 같이 대단한 작가들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껴 글만 잘 쓰는 자들로 폄하한 적이 있다.
이 글을 처음 접한 것이 약 40년전 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금성출판사의 한국대표문학전집을 통해서 였다. 글의 내용이 신선한 충격을 주었는데 선한 의도와 달리 좋지 않은 결과가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 마치 생선을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불편함을 주었다.
이제 먼 길을 돌아 이 말에 약간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의도가 선한가 악한가는 그리 중요치 않기 때문이다.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전 7:10-16)
최소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목회자가 지혜롭지 못한 것은 그 자체가 크나큰 죄악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