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반드시 필요한 책이라 여겨진다. 그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꼭 써주어야 할 정도로 정말 중요한 내용을 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심리학자요, 대대로 유대교 랍비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이 종교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또한 사랑하는 여인과의 사별로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서도 깊은 체험을 경험한 그가 ‘사랑의 기술’을 쓰는데 적임자라 여겨질 수 있다.
서두에 사랑은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상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 책의 의도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랑하는 능력의 획득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참으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을 몇 명이나 알고 있는지 물어보라고도 한다.
현대인들도 사랑을 갈망하고 행복한 사랑 이야기나 사랑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사랑을 배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닌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추구하는 방법은 남성의 경우 성공을 획득하는 것으로 여성의 경우 자신의 외적 매력을 갖추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매너를 갖추고 대화술을 익히는 등 성공하는 방법과 다를 바 없이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구매욕을 느끼듯 남녀 모두 자신이 탐내는 물건에 관심을 둔다.
시장 지향적이고 물질적 성공이 현저한 가치를 갖는 문화권에서 인간의 애정 관계가 상품 및 노동시장을 지배하는 것과 동일한 교환 형식을 따르더라도 놀랄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역설적이게도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기술은 매우 소중한 가치이다. 그는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과정은 어떠한가? 첫째는 이론의 습득이고 둘째는 실천의 습득, 셋째는 기술에 대한 숙달이라고 한다.
「사랑의 기술」에서는 사랑의 이론에 대부분을 할애하고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는 자신도 할 말이 별로 없다고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사랑의 이론에서 먼저 사랑을 인간 실재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고 한다. 인간에게는 이성이 부여되어 자신에 대한 인식 즉 인생이 짧고 원하지 않는 죽음이 찾아오고 사랑하는 자와의 이별 등 분리의 경험을 알게 된다.
이러한 분리를 극복하는 합일의 유형은 원시 공동체는 종교적 제의 형태로 나타났고 모두 인정하는 방법이었기에 불안감이나 죄책감을 동반하지 않았지만 공동 관습이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문화권에서 개인이 선택하는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은 심한 박탈감을 가져온다.
꽃을 사랑한다면서 물주는 것을 잊은 여인은 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상대에 대한 적극적 관심이다. 요나는 니느웨 주민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 않았고 카인처럼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물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비밀을 아는 방법은 철저한 지배를 통해 소유로 만드는 경우와 사랑으로 합일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경우가 있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다. 사랑을 받으라고 명령하지 않고 사랑하라고 명령하시지 않는가? 남녀의 성에 대해서도 절정은 주는 것이다. 오르가슴의 순간에 정액을 내어줌으로 생명을 잉태케 하며 여성은 이 모두를 사랑으로 받아주는 것이다.
갓난애일 때 느끼는 자극은 따스함과 음식 뿐으로 근원인 어머니와 구별하지 못한다. 성장함에 따라 다른 것들을 자각하게 된다. 음식을 먹을 때 어머니는 미소짓고, 울 때 안아주고 그런 경험이 사랑받는 경험이 된다. 날이 갈수록 독립의 정도가 높아지고 아버지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과 달리 조건이 있는 사랑임도 배우고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 어머니와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대상을 형제애와 모성애, 성애, 자기애, 신에 대한 사랑으로 나눈다.
사랑의 형태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형제애이다. 형제애는 동등한 위치의 사랑이라 할 수 있다. 구약 성경에 이방인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너희도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인 한 항상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까닭에 형제애는 기본 덕목이라 할 수 있다.
모성애를 설명할 때 구약성경에 약속의 땅(가나안)은 젖과 꿀이 넘쳐흐르는 곳이다. 젖은 보호의 측면이라면 꿀은 달콤한 행복감을 상징한다. 젖과 꿀을 줄 수 있는 어머니가 진정한 어머니상이라 할 수 있다. 이타적이고 무조건적인 모성애는 최고의 사랑으로 여겨진다.
성애는 완전한 융합을 갈망하지만 가장 기만적일 수도 있다. 성애에는 독점욕이 있어 사랑에 의해 자극되지 않으면 일시적 합일 외에 온전한 합일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감정만은 아닌 결단과 약속, 그에 대한 수고가 있어야 한다.
자기애는 방치하면 이기심으로 흐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자기애에 대한 기술도 배워야 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은 자기애는 본능처럼 존재함을 의미한다. 교육을 통해 자기애는 비이기적인 모습으로 발전해나가야 한다.
신에 대한 사랑은 에리히 프롬에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저자는 그렇게 생각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나에게 신 개념은 역사적으로 제약되어 온 관념 -이 관념으로 인간은 역사적으로 주어진 시기에 있어서의 인간의 보다 높은 능력의 경험, 진리와 합일에의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명백히 해 두고 싶다.
이것은 그가 무신론자임을 표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대립되는 역설적 논리학을 꺼내 중국 및 인도의 사상, 이후 변증법이라는 이름의 헤겔과 마르크스의 철학까지 펼쳐놓지만 결론은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이라고 어설프게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낸 신의 무명이라는 이름’은 엄밀한 의미에서 무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이다. 인간의 가치 체계에서 무엇이라 불려질 수 없는 절대자로서 굳이 자신을 드러낼 때 ‘스스로 있는 자’라는 표현보다 알맞은 것이 어디 있을까? 그런 의도와 달리 좁은 소견으로 무명이라 치부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결국 사랑에 대해 화두를 꺼내기는 하였지만 실천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겸손이라 여겨야 할까?
성경은 사랑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 무엇보다 주님이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귀결되지 않는가? 이보다 더 큰 실천을 어디에서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불신이 사랑의 기술을 묵혀두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