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53
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53
  • 안양준
  • 승인 2024.07.31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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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속에서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역자가 표현한 것처럼 당시 가톨릭 신앙은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반응할 수밖에 없는 공기와 같았고 저자가 생각할 때 그 공기가 오염되었다고 느낀 탓에 무언가 새로운 바람을 요구하게 된 것이 이 책을 쓴 동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곳에 스며든 공기, 그럼에도 오염된 공기를 걷어내는 작업이 결코 쉽지 않았기에 어떤 면에서 혁명과도 같은 심정으로 썼을 것이고, 너무나 조심스러워 풍자니 해학이니 라는 말로 가볍게 노크하는 심정으로 -그저 시장바닥의 떠돌이 장사꾼이나 광대, 재담꾼을 향해 쫑긋 세우는 귀, 그러니까 옛적에 우리의 친구 미다스 왕이 판의 피리 연주를 듣기 위해 내어주었던 귀 정도면 됩니다.- 사람들이 들어주길 바란 것이다.

「우신예찬」은 저자가 서문에서 친구인 토머스 모어에게 쓴 글을 통해 모어라는 이름에서 그리스 단어 ‘어리석음’을 생각해 내고 ‘어리석음의 여신 모리아’ ‘우신(愚神)’을 만들어 누군가가 우신을 예찬하는 것이 아닌 자화자찬 방식의 글을 쓴 것이다.

예를 들어 생명도 우신에게서 나왔다는 주장에 제우스조차 자식을 만들 때는 온갖 이상한 짓을 해야하고, 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자처하는 스토아 철학자들 역시 콧대 높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바보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생명이 결혼에서 비롯되고, 결혼은 우신의 시녀인 ‘경솔’에서 비롯되었기에 결국 생명이 우신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노인의 치매를 예로 들어 우신 덕분에 인생의 노년기도 즐겁게 보낼 수 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상징인 이성과 정념을 나누어 우정, 결혼, 가정 생활 등 모든 부분에서 이성만으로는 인간관계가 유지될 수 없고 어느 정도 어리석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신의 특징인 자아도취 없이 뛰어난 대중연설가나 전쟁 영웅이 탄생할 수 있고,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철학자들의 삶도 얼마나 어리석은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높은 전망대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인생이 재앙으로 가득한데 어리석음 없이 어찌 고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냐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주장은 에라스무스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공기를 바꾸는 것, 구체적으로 당시 카톨릭에 대한 비판을 하려는 것이다.

먼저 가톨릭에 만연한 온갖 미신들에 대해 크리스토포루스 성인을 그린 그림이나 상을 보는 날에는 절대 죽지 않는다거나, 성녀 바르바의 조각상 앞에서 주문을 외우면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온다는 것이다. 면죄부를 받아들고 기뻐하는 자들, 사제들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수학 공식이라도 있는 거처럼 연옥에 몇 년, 몇 달, 몇 일을 있어야 할지 계산해낸다.

기도문을 외기만 하면 즐거운 인생, 풍족한 삶, 무병장수가 주어지고 천국에서 예수님 옆에 앉게 될 것이라고 믿는 자들이 있고 천국은 이승에서 온갖 쾌락을 누리다가 마지막에 원하는 것이다. 각 지역마다 수호성인이 있는데 치통을 낫게 하고, 출산을 돕고, 양과 소 떼를 보호하는 성인이 있고, 모두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인데 혼자 모든 일을 돌보는 성모 마리아가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모에게 기도하는 것이 성자에게 기도하는 것보다 효험이 있다고 믿는데 성직자들이 돈벌이가 되기 때문에 허용하고 조장하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행복은 진실을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설교자의 진지한 이야기는 짜증을 내다가 성인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면 예수보다 더 경배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우신에 속해 있는 여러 부류 중 첫째가 선생이고 시인, 수사학자, 저술가, 법률가 등 마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어리석지만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부류가 모두 속한다.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들로 도도나의 청동 솥보다 더 시끄러운 변증가와 소피스트가 있고 긴 수염의 철학자도 있다. 다음으로 신학자도 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치는 편이 나은 것이 독초는 건드려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마치 삼층천에 살아가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에 대해서는 이단 냄새가 난다고 떠드는 자들, 그들의 복잡한 논쟁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미로를 빠져나오는 거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다. 그 외에 수도사, 주교, 추기경, 교황까지 모두가 우신에 속한다고 한다.

에라스무스는 기독교인이 받을 최고 상은 광기라고 한다. 여기서 광기는 열렬한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살아갈수록 행복과 기쁨이 커지는 것을 말한다.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천국의 삶은 어떤 것인가? 그곳은 영혼이 더욱 강해져 육체를 집어삼키고 승리하는 것이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을 간략히 정리하기는 쉽지 않고, 더구나 목회자의 시각 때문에 카톨릭을 비판하는 부분에 관심을 쏟은 것도 인지상정이라 여겨진다. 물론 그 이유는 현재 기독교가 카톨릭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 까닭이라 여겨진다. 에라스무스가 우신을 자처하며 지혜보다 어리석음이 낫다고 하지만 지식과 지혜 없이 어찌 분별력을 갖출 수 있을까? 에라스무스가 말하는 어리석음은 참된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토머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도 에라스무스의 소개로 만난 라파엘 히틀로다이오의 이야기를 소재로 쓴 것이다, 그 책 속에 에라스무스가 쓴 편지도 소개하고 있다.

에라스무스가 쓴 「우신예찬」은 짧은 시간에 일곱 번이나 개정판을 낼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보급되었고, 에라스무스를 르네상스의 주역인 인문주의자로 소개하기도 하고, 에라스무스가 번역한 라틴어 성경을 갖고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한 마틴 루터도 에라스무스가 종교 개혁에 동참해 줄 것을 여러 번 간청하였다.

하지만 에라스무스는 카톨릭의 사제이며 교리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행태만 비판하였기에 오히려 마틴 루터와 자유의지에 대한 논쟁을 하기도 했지만, 인쇄술이 발달하는 과정과 카톨릭에 대한 원성이 높아진 시기에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이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날 기독교에 대한 비판에 귀를 기울일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될까? 오늘날 기독교에 떠도는 미신에 사로잡힌 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영국에 있는 토머스 모어의 집에서 「우신예찬」을 쓰던 당시 에라스무스의 심정으로 글을 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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