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진의 「제부도」는 아픈 소설이다. 물론 어느 나라나 어느 시대이건 비극은 존재한다. 하지만 비극이라고 다같은 비극은 아니다. 외국 소설에서 넘쳐 나는 비극들과 마주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들의 작품이나 그래도 그리 멀지 않은 시대라 할 수 있는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은 물론 비극의 범주에서는 같은 장르에 속한다고 하지만 한국이라는 고유한 정서 속에 깊숙이 웅크리고 있는 비극은 약간은 색을 달리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 꽉 막힌 듯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이상하게도 끈적거리고, 말끔히 씻어내려고 해도 도저히 씻어낼 수 없는 한국인들만의 비극이 존재하는 것이다.
박경리의 「토지」에 등장하는 월선이나 봉순이의 삶은 한국 아낙네들에게는 일상적인 것이다. 분명히 비극인데 어떻게 해 볼 수도 없고, 그냥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의 실제적인 풍경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달라져 이제는 이해할 수도 없고, 결코 용납할 수도 없는 상황처럼 비쳐질 수도 있겠지만, 박경리의 「토지」의 배경보다 오히려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서하진의 「제부도」에서 과거의 아픔 전체를 껴안는 것 같은 그런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
소설 「제부도」는 이렇게 시작된다.
‘바다가 갈라지며 길이 드러난다. 오후 여섯시면 사라질 잠시 동안의 길이.’
자신을 가로막던 무언가가 열리며 길이 드러나지만 그것은 잠시에 불과할 뿐 또다시 닫힌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제부도의 특성이다.
불과 얼마 전 그녀와 함께 왔던 그 사람, 그러나 이제는 그녀 곁에 없는 그 사람.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연상한다. 먼저 싸리에 대한 기억이다. 싸리꽃이라면 지천으로 널려 있던 곳이 그녀가 자라난 곳이다. 거기 있는가 싶지도 않게, 피었다고 하기도 쑥스러운 모습으로 눈내린 자국처럼 희끗하다가 어느 날 눈녹을 때처럼 맥없이 사라지는, 아무도 싸리꽃을 꺾어 봄을 맞이하지 않는다. 노란 개나리나 진달래, 철쭉을 물동이에 꽂아두어도 싸리꽃에 눈을 주지 않았다.
싸리꽃이 무리지어 피는 봄이면 까닭없는 열병을 앓곤 했다고 한다. 어쩌면 싸리꽃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것이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싸리꽃.
그녀가 그렇게 된 연유는 그녀의 어머니가 첩이라는 사실이었다. 어릴 적부터 첩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하며 살던 그녀는 달아나고 싶은 심정 뿐이었다.
그렇게 가출한 그녀가 직장에서 만난 남자는 진한 립스틱을 바르면 “네 입술은 자칫 도발적으로 보이기 알맞아.”라고 나무란다. 그가 그렇게 말한 후로는 순하고 얌전해 보이는 색을 골라야 했는데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안색이 안 좋아, 또 잠 못 잤구나?”라고 한다.
그를 만나는 전날이면 일부러 밤을 지새워 창백한 안색을 만들고 무채색 옷을 고르며 가라앉은 분위기를 일구어 내려한 그 모든 행위가 만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던가. 무슨 일이 있을 수 있었던가.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에게도, 내게도.
그의 아내, 긴 머리의 해사한 얼굴의 인천의 모 국민학교 선생이라는 여자. 내게서 그를 뺏아가고 그와 결혼한 여자.
어느날 사무실 누군가가 그에게 “축하해, 장 대리. 득남했다면서? 한잔 사야지?”라는 말에 때마침 내 앞의 전화벨이 울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떤 말을 덧붙였을까. 그가 슬며시 그녀 옆에 다가와 “얘기했듯이 내 아내는 아이를 낳지 못해…. 어머니 성화 때문에 사내 하나를 입양했어. 주위 사람에게는 집사람이 낳은 것으로 했지.”라고 한다.
그런 날을 지내다 제부도에 왔고 물이 다시 잠기는 시간에 무리하게 차를 몰고 가다가 마지막 순간에 “안 되겠어. 돌아가야 할까봐. 길이 보이지 않으니, 내려서 뒤를 좀 봐줘. 당신 보고 갈 테니 저만치 가 있어. 빨리 내려.”라고 하고는 결국 나오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계획적으로 이미 회사에 사표를 내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지 말아요, 그 길은 너무 멀어요. 가지 말아요. 내게서 달아나지 말아요.”
그녀의 외침, 그녀의 몸부림은 아무 소용이 없고 결국 그녀를 울부짖게 한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오랜 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하지만 상대편의 음성은 엄마가 아니다.
“누구라꼬? 누구 찾는다꼬요?”
잠긴 목소리로 몇 번을 되풀은 후에야 여인이 “아아,”하고 말했다. “여 살던 딸네엄마요? 그 작년에 물에…”하고 그녀는 말을 끊었다.
이런 끝에 그녀 혼자 제부도에 온 것이다. 그리고 물이 잠기는 시간에 차를 몰고 나선다.
물이 차오르는 시간이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갈라섰던 바다가 수천 수만의 팔을 뻗어 엉겨붙으며 만나는 시간이다. 섬은 섬으로, 뭍은 뭍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이별하는 섬과 육지가 사납게 몰아치는 파도 같은 눈물을 뿌리는 시간이다.
그가 갔던 길을 가보리라. 그가 사라진 곳으로 나는 그를 따라가리라. 어둠 저편에 미소짓고 있는 그가 보였다. 그를 향해 마주 웃으며 나는 힘주어 가속페달을 밟았다.
책을 읽고 난 후에 그녀는 왜 그리 아픈 삶을 살아야 했는가를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그런 그녀가 수도 없이 많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능화의 「조선무속고」는 악령이 얼마나 쉽게 한 인생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삶,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을 향해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 주님이 말씀하신 팔복(八福)은 오히려 그런 자들이 복이 있다고 선포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