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좋아지면 다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처럼 살아보겠다고, 예수님 따르겠다고...
그런데 그런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강력한 저항군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 이 마귀란 놈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의 신앙적 순례의 길을 방해합니다.
1. 편리주의 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어떤 사람이 불연듯 찾아와서 말을 건넸습니다. “예수님! 저는 예수님의 광팬입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눅 9: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는 것은 좋지만 나를 따르려면 돈도 명예도 권력도 바라지 말아야되고, 집이나 안락한 삶을 포기해야 하는데 그래도 따르시겠소? 그러자 그 사람이 떠나갑니다. 편하고 싶은 세상에 불편함을 선택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그래서 마귀는 우리에게 안정적인 삶, 편한 삶을 강조하면서, 불안한 삶 / 불편한 삶을 거절하게 하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희생이, 헌신이, 봉사가, 선교가, 불가능했고 나 중심의 신앙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케네스 보아’ 라고 하는 사람은 [기독교 영성, 그 열두 스펙트럼]이라는 책
서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지고하고 거룩한 소명은 하나님이 먼저 보이신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다.”
참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쉽게 표현하면 ‘사랑 받고 사랑 하고’ 사랑에 대하여 응답하는 것!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도리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살고 계시나요?
2. 세속주의입니다.
예수님을 잘 따르는 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물으십니다. 혹시 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동행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합니다. ‘먼저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그런데 가고 싶지만 제가 집안에 아직 일이 좀 남아 있어서 지금은 어렵습니다.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 같아서 아버지 장례를 마친 후에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서운해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언젠가 철이 들거들랑 세상 사람들의 문제는 그들에게 맡겨 놓고 당신은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면 좋겠습니다...
[눅 9: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말로는 따르겠다고 하지만, 입으로는 방정을 떨고 살지만, 막상 선택해야 할 때, 막상 따라나서야 할 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뒤로 빠지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너무 좋습니다.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게 너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셨지만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거절할 때가 많습니다. 다 이유는 맞습니다. 합당합니다. 적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입장에서는 서운하십니다. 세상의 흐름을 따르며, 세상의 것을 우선으로 놓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아야 합니다.
3. 다원주의입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놓을 수 없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데 어렵습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어야 하는데 그래도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일단 운전석에 앉았다면 한곳만 보아야 합니다. 옆으로 뒤로 눈을 돌리면 사고가 납니다. 예수님만 보아야 하는데 자꾸 여러군데를 보려고 합니다. 기준이 하나인 사람이 행복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목표를 정했으면 갈 길을 정했으면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했으면 그냥 가야지 왜 머뭇거리고 뒤 돌아보고 주저하느냐고... 열심히 사는 것 같아도,, 우리는 여전히 방황하고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고 싶은데 편리주의 때문에, 세속 주의 때문에, 다원 주의 때문에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뒤 돌아보지 말아라!
세상 사람 닮아가려고 하지 말아라!
편하려고 하지 말아라!
그리고 네 천국 상급 바라보면서 신앙의 양심을 따라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