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소개하기 전 그녀가 쓴 짧은 글 「살아있는 느낌」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작가의 글을 모은 책 속에 <‘집 안의 천사’를 죽이는 일>이라는 글의 한 단락을 인용한다.
[빅토리아 여왕 말기에는 어느 집에나 이 천사가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글을 쓰게 되었을 때 저는 처음부터 이 여자를 만나게 되었어요. 그녀의 날개 그림자가 저의 원고지에 드러워져 있었고 방안에서 그녀의 스커트가 바스락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제가 그 유명한 사람의 소설에 대한 평론을 쓰려고 펜을 쥐었을 때 그녀는 저의 등 뒤에 와서 이렇게 속삭이더군요.
“여보세요, 당신은 젊은 여자입니다. 당신은 남자가 쓴 책에 관해서 글을 쓰고 계시군요. 동정을 갖고 부드럽게 쓰세요. 아첨도 하고 속이세요. 여성의 모든 기교와 간계를 이용하세요. 당신이 당신 자신의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세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순수성을 지니세요.”
그녀는 마치 저의 펜을 인도하듯이 행동하더군요. 저는 그 여자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목을 잡았어요.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그녀를 죽였어요.]
작가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유혹이겠지만 여성 작가이기에 더 크게 느껴지고 이겨내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삶 속에서 세 번의 자살 시도가 있었고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한 여인.
책 제목인 「댈러웨이 부인」 자체가 여성의 한계성을 드러내기에 마치 자신의 불편함을 드러내어 사회에 고소하는 형식처럼 느껴질 수 있다. 책 속에 그녀의 이름은 ‘클래리사’이다. 그러나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성을 따라야 하는…. “이제는 클래리사가 아닌 리처드 댈러웨이 부인이 있을 뿐 아닌가.”라는 독백이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6월 중순,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한 여인이 자주 그래왔던 것처럼 가정에서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꽃을 사러 나가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책의 첫부분에 생뚱맞게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열여덟 소녀시절을 언급하는 장면이 있는데 자연스럽게 과거에 대한 회상이 글 전체를 이끌어간다. 지금은 50을 넘긴, 병을 앓고 나서 흰 머리도 부쩍 늘고 그럼에도 여전히 매력적이라는 이야기는 듣는다.
길을 걷다 어렸을 때부터 잘 아는 사이인 휴를 만난다. 시골에서 살던 그는 아내의 병 때문에 상경했다고 한다. 영국 신사로서 교양을 갖춘, 그래서 남편 리처드가 휴 때문에 노발대발하기도 했고 결혼 전 남자 친구였던 피터는 그녀가 휴를 좋아한다는 것 때문에 지금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피터와는 늘 부딪혔고 무엇이든 말해야 하고 알아야 하고, 그로 인해 그와 헤어지게 되고 어느 정도 자유와 독립을 허락한 리처드 댈러웨이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그후 누군가로부터 피터가 인도로 가는 도중 여인을 만나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 함께 살게 된 예쁘고 대담한 샐리에 대한 기억도 떠올랐다.
길을 걸으며 자문한다. 언젠가는 자기도 죽어 없어진다는 것. 이런 것이 과연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이 모든 건 자기가 없어도 움직여나갈 것 아닌가. 죽음이 만사의 종말이라 생각하면 마음 편한 것 아닌가?
끝까지 주인공과의 만남은 없지만 셉티머스와 그의 아내 이야기가 또다른 축이 되어 소설을 구성한다. 그는 자원입대한 의용병으로 늘 함께 지냈던 에버스가 전사할 때도 아무 감정이 없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불안감에 사로잡히고 이제는 형태없는 무엇이 음성으로 나타나고 자살을 꿈꾸게 된다.
댈러웨이 부인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생각지 않게 피터가 인도에서 돌아왔고 지나간 이야기들을 나눈다. 피터는 리처드가 등장한 후 육감적으로 그녀와 맺어질 것을 느끼고 이후 그녀를 아프게 했다. 시간은 흘러 서로의 늙음을 인정하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간격을 인식하며 헤어질 때 댈러웨이 부인으로부터 파티에 참석해줄 것을 요청받는다.
소설은 단 하루 아침부터 저녁까지 있었던 일을 쓴 것이다. 물론 어릴 적 추억이나 당사자들과의 만남, 각 사람의 깊은 내면 상태를 담기에 내용 면으로는 조금도 부족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인생 전체가 긴 하루에 불과한 것 아닌가? 무척 분주했음에도 무엇 하나 이룬 것도 없고, 너무 쉽게 저녁은 다가오고 하루가 지나가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그렇게 끝나버리는 것이 아닌가?
피터가 바라보는 댈러웨이 부인은 지위나 상류사회나 출세 등에 너무 관심이 많은 여자이다. 특별히 눈에 띈다거나 예쁘다거나, 재치있는 말을 한다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그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티 같은 것도, 남편을 생각해서 연다. 그런 면에서는 그녀는 천재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들이 우글거린다. 남편보다는 갑절이나 재주가 있으면서, 사물을 남편의 눈으로밖에 보지 못하다니 결혼생활이 가져다준 하나의 비극이 아닌가. 그녀는 인생을 한없이 즐겼다. 즐기는 것이 그녀의 천성이었다.
파티가 시작되고 초대받은 자들이 자리를 가득 채운다. 뜻밖의 손님들, 어릴 적 친구들인 피터와 샐리, 휴가 참석하고 영국 수상까지 참석하여 자리를 빛낸다. 그때 그날 자살한 셉티머스 이야기를 듣게 되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고 파티에 전념한다.
딸 실비아가 먼저 죽은 후 심경의 변화가 왔고 기회만 있으면 해치고 방해하고, 망치려는 신들도 점잖게만 살아간다면, 꼼짝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막 피어나려는 소녀가 눈앞에서 쓰러지는 나무에 깔려 죽는 것을 보고 비관적이 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아무튼 신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딸 엘리자베스가 광신자인 미스 킬먼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불편하다. 파티석상에서 킬먼의 모습이 보일 때 속으로 “아, 미워라. 과격한 위선자, 더러운 여자 같으니, 무서운 힘으로 엘리자베스를 유혹한 여자, 살그머니 기어들어와 그 애의 마음을 훔치고 더럽히려는 여자”라고 말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삶, 그 속에 멀지 않게 느껴지는 죽음, 결국 이유야 어떻든 이 세상의 파티로 끝나는 인생에 미스 킬먼의 모습으로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